[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과 벌였던 몇 가지 사업을 마무리 지으며 변산 월명암 입산을 앞두고 장차 계획하는 회상에 붙일 회명을 고민했다. 조합체를 구성하고 사업도 벌였지만 일정한 명칭 없이 방언조합·저축조합·영산조합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또 옥녀봉 아래 속칭 구간도실이라 불리는 조합실을 건축하면서 기둥에 '대명국영성소좌우통달만물건판양생소'라는 17자의 옥호를 써 붙였지만 이는 회명이 아닌 옥호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식으로 회체를 설립할 때까지의 기성조합 체제로 전환하면서 대종사는 임시회명을 여러 방면으로 구상했다.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고, 주변의 식견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가급적 널리 여론을 수렴하고자 했다. 이때 만인연구회라는 회명이 강력하게 발의됐고, 이에 대해 대종사는 '불법연구회'라는 회명을 제시했다. 

대종사 대각 후 불경을 열람한 이후로 불법을 무상대도로 인정하고 연원을 대는데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제자도 있었다. 스승이 사찰에 별로 내왕한 바 없이 도를 성취했으므로 독자적인 이름으로 회상을 열자는 주장이 팽배했다. 때문에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 하자는 우리의 도이니 '불(佛)'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만법연구회로 하자는 제자들의 의견이 많았다. 

대종사는 이 제안에 "이 불(佛)자는 국한된 뜻의 불이 아니다"며 불법연구회라는 회명으로 상당히 기울어졌다.

불법연구회라는 공식 회명으로 원기9년부터 20여 년 남짓 일제강점기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왔다. 이후 정산종사가 불법연구회 회명을 임시회명으로 규정하고, 해방 뒤 교단 명칭을 '원불교'로 정했다. 完

[2019년 8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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