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을 말한다. 과거와의 결별이다. 익숙한 것을 보내고, 낯선 것과 만나기 위함이다. 처음 만남에 두려움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우리는 늘 새롭게 출발한다. 어제와 오늘은 분명히 다르다.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한다. 새로운 마음은 세상이 늘 신선하다. 학교 입학을 할 때 축하와 축복을 하는 것처럼, 새 출발은 주위에서 박수와 격려의 대상이다. 인생을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 보통급은 세상의 어떤 입문보다 가장 강렬하고도 새로운 인생 전환의 문이다.  

사찰 입구에는 산문(山門)이 있다. 그것을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한다. 밖에서 들어갈 때는 성스러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나올 때는 성과 속이 둘이 아닌 불이문(不二門)이 된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성속을 나눈 문이지만, 부처의 입장에서는 성속을 초월한 문이다. 범부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문이지만, 나올 때는 문이 없는 문을 나오게 된다.

그 문은 수없는 생을 거치며 무명으로 인해 마음에 쌓인 때를 씻기 위한 정화의 문이다. 열반과 해탈을 향한 문이다. 성불제중의 대각여래위를 향한 힘찬 출발의 문이다. 탐진치 삼독심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투장에 들어서는 문이다. 모든 의심과 편견을 버리고, 정법을 향한 불타는 서원을 세우는 문이다. 제불조사들도 통과했던 거룩한 문이다. 좁은 나의 세계를 벗어나 대양과 창공과 우주를 향한 대아(大我)의 세계를 향한 힘찬 비상이다.  

사실 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제불조사들의 말씀을 법문(法門)이라고 한다. 글이 아니라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온 세계와 우주를 관통하며 퍼져간다. 성현들의 깨달음과 자비의 말씀은 미몽에 헤매는 인생을 자각하게 한다. 진리와 법을 설하는 문이 미물곤충에 이르기까지 열려 가기 때문이다. 인연 따라 법의 문을 만나게 되면,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벗고 성현의 회상에 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그래서 대산종사는 보통급은 큰 집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혜개(慧開)선사(1183-1260)는 공안집 〈무문관(無門關)〉의 서문에서 "대도는 문이 없다. 천차만별로 길이 있으나, 이 관문을 꿰뚫을 수 있으면,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라(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라고 설한다. 알고 보면 문은 사방 도처에 있다. 바람 한 줄기, 흐르는 물소리, 짙어가는 푸르른 산색, 창공을 떠다니는 구름 한 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 장면, 수많은 책들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한 진한 감동 등 모두가 나의 육근문을 활짝 여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다. 한 마음이 깨어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부처의 종자가 따로 없다. 우리는 누구나 법신불의 종자를 품고 있으며, 어느 순간 도약하느냐에 따라 그 순서가 다를 뿐이다. 불타의 사문유관을 우리는 매일매일 접하고 있다. 퇴로가 없는 이 문을 과감히 깨고 나오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비약하게 된다. 지식의 유무, 남녀의 성별, 인종과 국가, 재산의 유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불문하고 누구든 불문에 귀의하여 평등하게 법명과 함께 십계를 받는다. 불법의 대해에 나의 영혼을 던지는 그 순간이 바로 보통급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8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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