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김영택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아무것도 없던 시절. 개척교화에 헌신하며 희사만행하는 지타원 전기철 교무의 모습에 감동받아 출가하게 된 태산 김영택(75·太山 金泳澤) 원로교무. 마치 무염선사가 중생을 위해 불석신명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아 출가한 구정선사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전무출신에 대한 그의 강직한 서원과 의지는 훗날 어려웠던 교중 살림을 되찾고 지금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원불교와 만남, 그리고 감동
그는 1944년 경남밀양에서 부친 한산 김원규와 모친 간타원 김호연 사이에서 8남매중 2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10살 되던 해 부산으로 이사해 12살에 원불교를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부산상고를 다니던 친형 김승환이 원불교 유인물을 들고온 것이 계기가 됐다.

"형님이 부산진 교당을 먼저 다니다가 연원이 돼 나도 나가고 부모님도 나가게 됐지. 그래서 나는 유년회, 학생회, 청년회까지 부산진교당에서 다녔어."
스무살 되던해 그는 경남 고성군청 지적공사에 들어가 재산관리와 지적측량 등 지적민원업무를 보았다.

"직장 때문에 고성으로 옮겼지만 그곳에는 교당이 없었어. 부산진에서는 활발히 활동했는데 막상 교당생활을 할 수 없으니 너무 아쉬웠지."

다행히 그가 직장을 옮긴지 1년이 지나자 마산교당에서 연원교당으로 고성교당을 냈다. 너무나 반갑고 기뻤던 그는 군청에 다니면서 교당일을 주인처럼 열심히 했다. 고성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했던 지타원 전기철 교무는 갖은 고생속에서도 내색없이 열심히 살았고, 그는 그런 교무의 삶을 직접 보고 배우며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나는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부러울게 없는 줄 알았지. 그 분을 뵈면서 뭔가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사는게 진짜 인생사는 것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나도 전무출신해야되겠다 마음을 먹게 됐지."

중질이라도 똑바로 하자
그의 출가 결심은 비장했다. 출가는 곧 스님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출가하면 사회 인연을 다 끊는 일로 알고 있어서 마음을 꽤 단단히 먹었지. 고성에서 6년 살고 7년차 때 부산진 구청으로 근무지가 바뀔 때였는데, 근무하면서 출가하려는 마음을 계속 다지는 시기였어."

10년을 채우고 그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는 출가하면 결혼 안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중도 속(俗)도 못될 바에는 중질이라도 똑바로 하자'고 마음먹었지. 그런데 와서보니까 대부분 결혼하더라구. 그래도 내가 나에게 다짐하고 약속했던 일이라 생각을 쉽게 변할 문제가 아닌거야. 정남으로 오롯이 살기로 했던거지."

내가 좋아서 찾아온 곳
그는 원기56년 부산진교당에서 간사근무를 1년하고, 이듬해 신도안에 있는 삼동원에서 간사근무를 했다. 어디나 마찬가지었지만 특히 삼동원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수계농원보다 어려웠어. 여기는 먹을 것이 귀하기 때문에 일이 있으면 낮에 고구마라도 삶아주는데, 일 없는 날이면 점심 자체를 안줘."

그러나 그에게는 도심(道心)이 있었다. 부처님도 설산고행에서 목숨을 걸었다는 예화는 그의 마음에 큰 버팀목이 됐다.

"내 경우 농사짓는 거 구경 한 번 못한 사람이여. 얼마나 힘들었겠어. 당시 장갑이 없어서 논도 맨손으로 메는데 하고 나면 지문이 없어져. 그래도 내가 좋아서 찾아온 곳이라 고생이라 생각 안했어."

전생의 불연이 깊은지 그는 선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했다. 아침 좌선을 하고 나면 정신이 초롱초롱 맑아지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아침 좌선이 끝났을 때, 저녁 염불이 끝났을 때 남아서 30분씩 선을 더했다.

이후 동산 이병은 종사의 추천, 당시 부산진교당 주타원 윤주현 종사의 보증으로 그는 교학과에 수보리로 입학하게 된다.
 

"나는 모두가 은혜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아. 
그래서 일일일선을
표준으로 하루 한가지 이상 
작은 것이라도 선행을 
실천하기에 힘쓰고 있어. 
영생을 믿는 수행인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감사와 은혜를 발견하면서 
사는 공부를 잘해야 해."

교단이 필요한 사람으로
졸업을 앞두고 그는 교화현장에 발령받을 설레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부산진교당, 고성교당에서 지냈던 것처럼 자신이 펼쳐갈 교화의 꿈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재무부 법인사무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당연히 교당으로 가는 줄 알았지. 그런데 총부로 발령났다는거야. 고민하다가 수화불피하겠다고 선서식 한지가 한달도 안됐는데 어른들 속썩이면 되겠냐 싶어서 법인사무국으로 들어갔지."

그에게 법인사무국 관련 업무들은 오래전 직장에서 해왔던 일들로 수월했다.

"1년 살아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교단이 필요한 것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전무출신은 교단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싶었지. 교화는 조금 접어두자고 마음먹었더니 편해지는거야."

그는 정말 교단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재산 대장에는 당시 사고팔았던 정리가 잘 안돼 있어 정확히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자금을 빌려주며 저당 잡은 땅문서들은 제대로 있는지 파악이 안됐다. 그는 전수 조사에 나섰다.

"정리도 많이 했지만 찾기도 많이 찾았지. 당시 교정원장이었던 다산 김근수 종사께서 '영택이는 총부에서 평생 먹여줘야 할 만큼 밥값했다'고 칭찬해 주셨지."

그는 23년간 원불교 재산관리에 매진했다. 이후 원기85년 감찰원사무처로 발령받았다. 원기89년에는 그는 꿈에 그리던 교화현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대신교당이었다. 환갑이 다 되어 받은 첫 교당 발령지였다. 그는 아침 저녁 교도들을 위한 기도와 순교에 매진하며 교화에 최선을 다했다.

원기91년에 다시 총부로 돌아와 재정부원장과 재정산업부장을 겸직한다. 퇴임시까지 그는 교단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혈성을 다한다.

은혜를 절대 잊지말아야
"전무출신이 직장인이 되어서는 안돼. 그동안 교단에서 신심·공심·공부심을 상당히 강조했는데 지금은 많이 퇴색했어." 오랜기간 교중 살림을 관리하고, 사업부 일을 도맡아 해온 그에게 후진들에 대한 걱정은 다름아닌 서원이었다.

"사명감이나 출가서원이 순숙되고 공부심으로 살아날 때 '어찌 다행 이 회상 만나 이 공부, 이 사업 하게 되었나'하고 보람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그러지 않으면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비판이나 하면서 불평불만 가득한 무늬만 전무출신이 되는거야."

그는 인생을 커피 맛으로 비유했다. 세상만사 갖은 꼴 다 겪고보니 단맛도 있고, 쓴맛도 있고, 뜨거운 맛도 다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소태산 대종사의 근본 가르침에 귀의하고 실제 실천해 나가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부했다.

"나는 모두가 은혜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아. 그래서 일일일선을 표준으로 하루 한가지 이상 작은 것이라도 선행을 실천하기에 힘쓰고 있어. 영생을 믿는 수행인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감사와 은혜를 발견하면서 사는 공부를 잘해야 해."

[2019년 8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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