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상대방, 상황과 시비이해를 전체와 부분
변화로 볼 수 있어야 만사를 원만하게 이룰 수 있다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지도인은 공부인이 자신을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로 원만하게 보도록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해오는 공부인이 지도인에게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한 공부인의 질문에 지도인의 진리적 해석이 더 선명해집니다. 지도인과 공부인은 마음을 공부하며 영생을 함께 걷는 도반입니다.

▷공부인: 다른 사람이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르거나 일을 똑 부러지게 하지 못하면 무시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겸손하지 못한 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괴롭습니다. 

▶지도인: ○○공부인은 어리석군요.

▷공부인: 제가 어리석다고요? 겸손하지 못하다는 말은 수긍하겠지만 어리석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도인: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어리석음(愚)을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 자지"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정전〉 팔조). '대소 유무'는 '사리 연구의 요지'에 자세하게 설명돼 있는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대(大)는 '전체', 소(小)는 '부분', 유무(有無)는 '변화'를 뜻합니다. '대소 유무'는 일원상의 진리를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라, 일원상의 진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인은 지금 자신을 전체와 부분과 변화(대소 유무)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있어요. '○○공부인은 원래 겸손한 사람이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겸손하지 못했구나'해야 자신의 전체와 부분과 변화를 동시에 보는 거죠. 그러면 상대방을 전체와 부분과 변화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 사람도 원래 잘 모르는 사람, 똑 부러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잘 모르기도 하고, 똑 부러지지 못하구나'하고 말이죠. 

▷공부인: 그러고 보니 무시했던 사람에게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부분이 있어서 배운 적이 있어요. 

▶지도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니 대단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 자지'하는 것도 어리석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행자지(自行自止)'는 자기 마음대로 했다 말았다하는 것입니다. 즉 일의 옳고 그름(是非)과 이롭고 해로움(利害)을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시비와 이해가 없어야 한다거나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회생활 하다보면 많은 시비(是非)와 이해(利害) 속에 살게 되는데, 이 세상을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정전〉 사리연구). 

일하다 보면 나와 상대방의 옳고 그름이 다를 때가 많고, 나와 상대방의 이해가 다를 때도 많습니다. 만일 시비와 이해가 없어야 공부를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공부인: 그럼 어떻게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하죠?

▶지도인: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됐기 때문에(〈정전〉 사리연구) 시비 이해가 생겼을 때 대소 유무로 바라보는 공부를 하면 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전체와 부분과 변화(대소 유무)로 바라보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시비 이해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됩니다.

▷공부인: 제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마음이 나올 때도 제가 생각하는 시비 이해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시비 이해가 달라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도인: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경계마다 '의(疑)'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입니다(<정전> 팔조). 
일은 '시비 이해의 일'이고, 이치는 '대소 유무의 이치'입니다. 즉 나와 상대방과 상황, 시비 이해를 전체와 부분과 변화로 바라볼 수 있어야 만사를 원만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8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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