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윤관명 교무]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벌써 3년 전이다. 교단 2세기에 원불교는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생각해 본다. '오래된 미래'라 했던가! 나는 이 말을 앞으로 나아갈 길은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해 본다. 우리 교단이 4회를 준비함에 있어 초기교단의 창립정신을 되새겨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겠다.

초기교단의 창립정신은 이소성대, 사무여한, 일심합력이다. 첫 번째,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일을 이룸'이라 한다. 영광 백수면 길룡리의 궁핍한 시골에서 시작해 농토를 얻고자 방언공사에 피와 땀을 흘렸고, 엿장수, 숯장수를 비롯해 초기교단의 선진님의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일궈온 교단이다. 그러나 외형은 작았으나 그 마음 만큼은 세계사업을 하고 있었으니 이소성대의 뜻을 나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작게 시작하더라도 그 마음이 크다면 반드시 큰 뜻을 이루리라. 그리고 '진정 무엇을 키울 것인가'하는 화두가 있어야 한다.

교단은 한국이 겪어온 시대적 아픔을 함께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사변 그리고 경제위기 등 한국의 격변기 속에서 교단은 늘 존립의 위협을 받아 왔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키워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닌 '마음'이다. 작아진 마음을 크게 키운다는 것은 남의 사정을 살필줄 아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정 나에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찾는 일이다. 아직 부족하지만 한편 부족하지 않다.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 가는 데 십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십분이 다 뜻에 맞을지라도 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나누어 즐기므로, 그로 인해 재앙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복이 항상 무궁하나니라." (〈대종경〉 인도품29장)

두 번째, 사무여한(死無餘恨)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법인기도를 올리신 구인선진들의 마음이다. 인류 구원의 책임이 나에게 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목숨마저 내 놓을 수 있는 희생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자기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다. 나와 인류가 둘 아닌 하나임을 깨달은 마음이다. 그러기에 사무여한은 죽기살기로 목적하는 바를 행함에 있지 않다.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사랑이며, 은혜로 이어진 일체생령에 대한 애정인 것이다. 원불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이 그 동기니라."(〈정전〉 개교의동기)

세 번째, 일심합력(一心合力)은 '하나의 마음이 되어 힘을 합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원불교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교단은 내부적인 큰 고비를 겪을 때마다 모든 재가출가 교도들의 합력으로 기적적인 결과를 보여왔다. 그러나 더이상 일심합력을 강조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구성원의 마음을 모을 교단적 가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힘을 모은다해도 초점이 맞지 않는다면 성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합력이 아닌 한사람 한사람이 주인되는 주체적 협력으로 교단 4회를 준비해야 하겠다.

/동창원교당

[2019년 8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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