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미국 원다르마센터에서 좌선수행의 원리와 호흡의 방법, 앉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신문=조덕상 교무]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에서는 마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류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노력의 일부를 지면을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두 발로 일어서다
소태산은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우자'라고 말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서른 살에 세움이 되었다(三十而立)'고 말했다. 여기서 세움이란 무엇일까? 질문이 추상적이니 실질적으로 바꾸어보자. 우리는 왜 두 발로 설까?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을 두 발로 걸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두 발로 선다(세움)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직립동물이다. 언제부터 두 발로 섰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연구에서 수백만 년 전부터 인류가 지금과 비슷하게 서고 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확실한 것은, 몸을 세우는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하여 직립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어나자마자 걷는 동물도 많은데, 인간은 발달이 더디어 걸으려면 1년 정도를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다른 동물을 넘어선다. 현대문명은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다른 고도로 발달한 동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큰 그릇이 늦게 만들어진다(大器晩成)고 했는데, 인간이 그렇다. 그런데 왜 두 발로 서는지, 왜 두 발로 걷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두 발로 서고 두 발로 걷는다는 점이다. 굳이 대답을 찾자면 어느 책 제목처럼 인간은 '걷기 위해 태어난(born to walk)' 존재이다.

만물의 영장이 되다 
직립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직립으로 생겨난 인간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크게 세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손의 자유로움이다. 손이 땅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는 인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손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로 변화시켰다. 둘째, 언어의 사용이다. 직립은 성대 구조를 변화시켰다. 직립하게 되면 척추와 머리의 각도가 달라지면서 후두가 아래로 내려오고 소리를 진동시킬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즉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결과적으로 언어가 발달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눈높이의 변화이다. 네 발로 걷는다면 앞다리의 길이만큼의 높이가 시야의 전부이다. 그런데, 직립하면서 뒷다리와 몸통의 길이만큼 높아진 시야를 확보했다. 직립은 더 넓고 더 멀리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했다.

직립의 힘은 인류를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로 만들었고, 문명을 이루고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인간은 지구상에서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
 

입(立)의 갑골문에는 땅 위에 서 있는 존재를 묘사하고 있으며, 인류 진화는 세움(立)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은혜, 그 위에 서 있는 존재
이러한 인류의 역사를 나타내는 글자가 있다. 바로 '立'이다. '立'의 갑골문, 금문, 소전을 살펴보면 '땅 위에 서 있는 존재'를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땅 위에 서 있는 존재(立)가 되면서 현재의 인류가 된 것이다. 이 안에는 오랜 역사가 담겨 있다.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땅에 바탕하고 있다. 땅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생명을 유지해 왔고 땅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땅 위에 집을 짓고(立), 공장을 짓고(立), 여러 새로운 것들을 지어나갔다(立). 따라서 땅이 있기에 인류 문명을 세울(立) 수 있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땅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원불교에서는 땅을 은혜라고 보았다. 여기서 은혜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서 중요하며, 구체적으로는 땅이 있어서 우리가 형체를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세우고 걷는 것은 땅이 있기에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인류는 은혜라는 땅 위에 서 있는 존재이며, 은혜라는 땅 위에 물질문명을 건설해 온 것이다.
 

입(立)은 사람과 땅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과 땅의 조화
이제 명상의 세계로 가보자. 땅이라는 은혜를 명상의 핵심적 요소로 삼아 보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우리의 몸에 집중하고 있다. 몸의 움직임, 몸의 느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그동안 명상의 방법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지금도 이 방법들은 유효하다. 이러한 방법은 '立'에서 사람을 강조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방식은 사람을 강조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立'의 관점에서 사람을 강조할 수도 있고 땅을 강조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땅의 조화이다. 기존의 방법이 주로 사람을 강조하는 수행법을 택하고 있기에, 필자는 은혜의 관점에서 땅을 강조하는 수행의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땅을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대의 인간은 다른 동물 위에서 왕처럼 군림해 왔다. 직립의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물질문명을 고도로 발달시키며 지구환경을 포함한 무수한 동식물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사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은혜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 출발점은 땅이다. 땅의 은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땅이라는 은혜의 관점에서 명상을 이야기해 보겠다. 지면의 제약상 좌선의 앉는 자세와 걷기명상을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하겠다.

은혜와 함께 앉고, 은혜와 함께 걷기
땅에 대한 느낌, 땅에 대한 자각은 명상의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땅의 은혜를 느끼고 알아가는 것으로 땅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가지는 것이 된다. 

좌선할 때 방석을 펴고 반좌로 편안히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 '立'의 입장에서 보면 좌선할 때 상체를 꼿꼿이 세운다. 그런데 잘 보면 상체는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 모두 '立'의 상태이다. (서 있을 때는) 두 발로 서 있고 (앉아 있을 때는) 두 엉덩이로 서 있는 것이다. 평좌이던 가부좌이던 의자에 앉던 몸통은 세운다. 따라서 몸통의 입장에서는 앉은 적이 없다. 엉덩이가 새로운 발이 되어 땅(방석) 위에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 방석은 땅의 은혜이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 서 있듯 앉는 것이 좌선의 자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Mindfulness 저널의 'How to Sit in Sitting Meditation' 참고)

또한 땅을 느껴가는 것으로 걷기 명상을 할 수 있다. 이는 땅이라는 은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가는 것이다. 걷기는 땅과 나의 만남이다. 땅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곧 나를 새롭게 만나는 순간이 된다. 이는 보은의 원리가 되고 명상이 된다.

여기에서는 땅을 중심으로 논의를 했다. 은혜의 출발점으로 땅을 이야기한 것이다. 땅은 하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속에는 이미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모든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 땅을 강조하는 명상은 결국 원불교의 은혜 사상을 명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엇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바로 땅이다. 인류는 땅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땅 위에 문명을 건설했다. 이제는 다시 땅으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立'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마음 땅(心地) 위에 정과 혜와 계를 세우도록 했다. 공자는 30에 '立'이 되었다고 했는데, 마음의 힘을 세우라는 뜻이 아닐까. 어쩌면 진정한 위대함은 마음으로부터 세워져야 할 것이다.

명상전문가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 박사
현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2019년 8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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