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산 최준명 종사

[원불교신문=안세명] "말을 앞세우기 보다는 묵묵히 실천하면 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뭐 좀 했다는 그 소리가 나는 듣기 싫다." 건산 최준명 종사(87세·建山 崔俊明·신촌교당)에게는 긴 질문이 필요 없다. 마탁된 무상(無相)의 심법이 그의 오랜 수행이자 활선(活禪)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일생을 불사로 일관하셨는데
그는 최근 간성교당 신축을 비롯해 경기인천교구청, 수원교당, 염산교당, 영산교당, 육군사관학교 화랑대교당 등 교단 곳곳에 불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내가 이제 곧 죽을 나이인데, 누가 해도 할 일이고 생색 낼 일도 아니다. 있던 것도 없애야 한다. 다만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보고 마음 내는 교도들이 생겨난다면 그건 큰 보람이다." 오랜 교단생활을 통해 법 높은 전무출신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신심 깊은 거진출진들이 주춧돌이 되고 기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그에겐 깊다.

40년 전, 그때부터다. 고향 영광에 늙으신 어머니를 찾아 "제가 조그마한 집이라도 하나 지어드리고 싶습니다"하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하나 있다. 나는 이대로 살아도 좋으니 영산교당을 네가 꼭 좀 지어주거라." 아낌없이 베풀어 키운 자식이지만 그토록 미안해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렇게 영산교당을 짓고, 지난해 다시 봉불식을 가졌다. 시골 교당치곤 욕심을 부렸다. 성지를 찾는 이들이 편안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후회 없이 공을 들였다. 이 모든 것이 대종사의  은혜에 보은하고자 서원한 그의 간절함이다.

교단 구석구석 소식을 듣고 어려운 곳에 손을 넣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강원교구 간성교당 신축을 약속하고 온 그는 김석기 교무에게 당부했다. "교화가 30년이 넘었으면 뿌리 내리는 교도가 있어야 한다. 집 짓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봉불 전까지 교도 30명을 만들자. 그 정도는 돼야 교당이 유지될 것 아닌가." 불심이 약한 지역 정서를 충분히 이해하는 그이지만, 교도가 없는 교당은 양보할 수 없다. 교당을 찾는 군장병들만 가지고는 지역교화가 뿌리 내릴 수 없다. 그래서 쉽지 않겠지만 강원교구장에게 15명, 김 교무가 15명 교도를 만들어 낼 것을 약속 받고 신축을 결심했다. 지역민들이 교당에 귀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화이기 때문이다.

전이창 종사 심법에 큰 공부했다
예타원 전이창 원로교무와 그는 사제의 인연으로 통한다. 함께 한 3번의 공사에서 그에겐 매 순간이 깨침의 연속이었다. 

전 원로교무는 언제나 빚을 내서라도 단 돈 10원까지 정확히 정산했다. 보통 사람들은 돈에 맞춰 건물을 지어 달라 하지만 전 원로교무는 그에게 마음을 다해 지어주기를 기도하고 지도했다. 
한 번은 돈을 빌리러 다니는 스승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공사를 마친 뒤 시봉금을 올렸다. 전 원로교무는 "일 잘했으면 됐지, 무슨 돈을 주느냐." 그렇게 말씀하시고 헤어졌는데, 3개월이 지나니 중앙총부 3개 부서에서 영수증이 날아왔다. 각 부서의 중요사업에 그의 이름으로 사업을 올려 준 것이다. 무상의 큰 심법을 배웠다.

동산선원 건축 시 잔금을 주기로 한 날 약속시간을 어기고 늦게 돌아온 전 원로교무의 지친 어깨를 보고 이심전심으로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돈 달라는 말도 못했다. 늘 빚을 내서라도 공사비를 만들어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가 됐다. 나도 건설업자니 뭔가 이윤이 남아야 하는데 그 어른하고 일을 하면 돈 남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래서 받으려는 마음을 비워야 편했다."

현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전신인 중앙훈련원 건축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시작했다. 대산종사가 급히 찾아 가보니, "준명아, 내가 훈련원을 짓기 위해 천일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위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늘이 하늘이 아니고, 땅이 땅이 아니다"고 말씀하는데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또한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 원로교무는 구조실 앞에서 "성자의 말씀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 있어. 함부로 듣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문득 서재에서 꺼낸 불경을 읽게 됐다. 인도의 노승에게 젊은 상좌가 찾아와 공부하기를 청하자 "5년간 밥을 먹고 공부하려면 상당한 선비가 필요하다"는 말에 젊은 수행자는 3년간 죽어라 일을 해서 돈을 마련했고 다시 스승을 찾았다. 노승은 가져온 은화보따리를 슬쩍 본 후에 그 돈을 갠지스강에 뿌리고 오라고 명한다. 수행자는 그토록 힘겹게 벌어온 돈을 차마 다 뿌리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버리자 주위에 목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돈을 주으려 아우성치며 몰려들었다. 

노승의 시자가 "돈을 버리라 했으면 빨리 버리고 와야지 지금 뭐하고 있어. 빨리 와"하고 호통을 치니 그제서야 정신 차린  수행자는, 공부하려고 노승에게 바친 선비가 이미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스승은 애착을 떼게 하려고 공부시킨 것이다.

전 원로교무와의 만남도 매 순간 애착을 떼는 수행이었다. 마음 속에 사심이 일어나면 "지금 뭐하고 있어. 빨리 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후로는 이 한 마음을 내게 하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됐다. 공부하고 깨친다는 게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중앙훈련원 공사는 10억 공사였다. 한번은 선급금을 준다고 해서 총부에 내려갔다. 전 원로교무는 선급금 1억원을 주면 되는 데 주기도 전에 공사비 1억원을 깎자고 했다. 그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 그는 '저 분이 무슨 마음으로 깎자' 하는지 그 마음이 알고 싶었다. 1억이 아닌 2억이라도 깎을 준비가 돼 있었던 그였다. 또 어떤 큰 공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침묵끝에 그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랬으면 된 거다." 그는 계약서 쓰기 전에 선급금 받았다는 영수증을 썼다. 거기에서 또 한번 깨쳤다. "갠지스강에 돈을 버리고 오라"는 노 스승의 뜻을 알아챈 것이다. 돈이 적다 많다 그런 분별하지 않고 공사에 임하라는 스승의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니 마음이 개운해지고 환히 열렸다. 내가 벌었다 안 벌었다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어졌다. 그때도 지금도 교단에 어떤 자리에서도 그는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고 말한다. 
 

요진건설산업이 시공한 원불교소태산기념관 개관식이 9월21일(토) 오후2시에 진행된다. 이날 서울교구청 및 한강교당 봉불식에는 전산종법사가 설법을 주재한다.

원불교소태산기념관 봉불을 앞두고
큰 공사를 할 때면 스승과 교무를 모시고 '안전제'를 꼭 지낸다. 그래서인지 큰 공사를 진행하면서 인명사고가 없었다. 이번 소태산기념관도 안전제를 지내고 기도하니 그 힘으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렸다,

그는 지금도 이틀에 한번은 소태산기념관을 찾는다. 10층부터 지하 4층까지 꼼꼼히 살펴보니 곳곳에 하자가 보인다. 여러 가지 민원이 발생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정성을 다해 마무리할 생각이다. 현장 감리들에게도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안 보이니 주인의 심경으로 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교당다운 교당을 지어야 하고, 규모 있는 건축으로 교도들의 심미적 충족감을 줘야 한다"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만 좋다고 주장해서는 살 수 없다. 이사병행(理事竝行)의 교법으로 무장해 서울교화에 전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태산기념관에 직접 가서 보면 재가교도들이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원불교를 상징하는 기념관이라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서울교화는 물론 세계교화의 지평을 열어가는 터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꼭 가보라고 권한다"고 봉불식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소태산기념관을 볼 때마다 예전 서울회관의 역사를 떠올린다. 서울회관이 남한강 사건 여파로 1~3층 골조만 서있고 4~5층은 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고인이 된 예산 이철행 교무가 당시 감독 겸 책임자로 있었다. 그때는 레미콘도 없던 시대였다. 시멘트를 믹서로 돌리고 린치로 끌어 올려서 공사했던 시절이다. 이 교무는 당신이 시멘트 100포를 미리 사다놓고 꼭 한포 씩 더 넣게 했다. 그는 "적당하게 배율을 맞춰 넣기 때문에 더 넣으면 필요 없는 강도가 가해져서 좋지 않다"고 몇 번을 얘기해도 이 교무는 끝까지 고집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래야 내가 밤에 잠을 자더라도 잔다 말일세…." 그는 이 교무에게 전무출신의 교단을 사랑하는 주인의 심법을 배웠다. 

그는 "교무 한 분 한 분이 다 그런 분들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후래 제자들이 다 그런 어른들이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전무출신들도 결코 그 분만 못한 게 아니다. 시절에 따라 교역에 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며 "세상이 그만큼 달라지고 있다. 지금 자라나고 있고 현장에서 묵묵히 교화하고 있는 전무출신들이 대종사 당대의 선진들 만큼 일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냄새 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이생도 모르는데 내생을 말할 수 없다. 현재 있는 사람들이 자기답게 살면 그것이 내생준비다." 

그는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람냄새'가 나야 함을 강조한다. 그 말을 듣고 웃는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당신이 사람냄새 나는 것 같아?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냄새가 나거든. 그것은 사람답게 살았기 때문에 나는 것이야. 우리가 종법사와 스승에게 가까이 가려 하는 것도 사람냄새를 맡고 싶어서야. 그렇게 살아보기 위해 애를 써야 해.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지 말어." 또한 그는 남에게 들은 얘기에 입담을 보태서 죽은 얘기 하는 이들에겐 호통을 친다. "너의 진실된 얘기를 해라. 죽은 말 하지 말라. 남의 말은 아무리 잘해도 실감나지 않는다. 자신이 교법으로 달라진 얘기를 해야 한다." 

한국보육원에 교단적 관심을 가져달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엔 언제나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보육원을 운영하시며 "내 자식 남의 자식 종당에는 하나다. 외롭고 쓸쓸하지 않게 키워내라"고 하신 유훈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현재 25명의 식구들이 남아있다. 다들 귀한 자식들이다. 보육원이 없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다"며 "이제 이곳은 서울수도원으로 새롭게 변모되길 희망한다. 교단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새로운 설계를 하길 간절히 원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아내인 영타원 김용복 대호법과 신촌교당 예회와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맨 앞 자리에 앉아 교무의 설법을 경청하는 그의 모습에 교도들은 아버지로, 심사(心師)로 그를 존경하고 사모한다.

그는 말한다. "내생공부 특별한 거 없어. 나는 매 순간 대종사와 어른들을 떠올리며 온전히 닮아갈려고 애쓸 뿐이야."

건산 최준명 종사 약력

ㆍ원기76년 대호법 수훈
ㆍ원기91년 종사 수훈
ㆍ종교연합후원재단 이사장
ㆍ원불교성지사업회 회장
ㆍ요진건설산업(주) 회장
ㆍ휘경학원 이사장 
ㆍ사회복지법인 원불교창필재단 이사장

[2019년 9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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