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명 교무

[원불교신문=윤관명 교무] 부처님은 29세에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7세부터 자연이치와 인생의 의문을 품고 20년간 수행길에 들어섰다. 두 성자의 의문은 오랜 구도 끝에 깨달음을 만난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의문을 놓지 않았다. 성자가 깨달은 바는 '교법'이 되고, 종교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하면 절대적 믿음을 연상하지만 불교의 핵심은 깨침을 향한 '끝없는 의문'이 아닐까? 종교에 입문하는 이는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자 성자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생활은 성자가 밝힌 교법을 등불 삼아 내 안에 있는 의문을 풀어가는 깨침을 향한 항해라 하겠다.

그럼 의문이 왜 중요한가? 〈정전〉 팔조에서 "의(疑)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 한다. 무슨 일이든 해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맹사성은 19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지방군수가 되어 덕망 있는 노승을 찾았다. 군수로써 지켜야 할 덕목을 물었다. 노승이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자 맹사성은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냈다. 그러자 노승이 찻잔에 차를 따르는데 잔을 넘쳐도 멈추지 않았다. 맹사성은 "스님 찻잔이 넘쳐 차가 바닥을 더럽힙니다"라고 하자. 노승은 "차가 넘쳐 바닥을 더럽히는 것은 알면서 학식이 넘쳐 인품을 더럽히는 것은 왜 모르십니까?"라고 답했다. 질문을 하려면 먼저 내 안에 채워진 분별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소태산은 <정전> 솔성요론 첫 번째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밝혔다. 석가모니는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을 등불 삼고 법에게 의지할 것이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대열반경>했다. 이것은 교조 당신을 의지하는 것마저도 경계하시고 오직 법을 믿으라는 간곡한 표현으로 이해한다. 나는 교단 현실에 우려되는 점이 있다. 교당과 기관의 책임자가 구성원과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 종교적 신앙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법과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에서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오직 믿고 받들어야 하는 것은 성인의 말씀과 법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는 서로 간의 문답을 통해서 하고, 공사(公事)는 공의로 하라" 했다.

스승도 제자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교무는 교법에 전문가일뿐 각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다. 그래서 지자본위로 공부하고 일하라 한 것이다. 공의를 얻지 않고 단독 취사를 하거나, 전문 분야에 있어 지자본위를 따르지 않고 권위로 일을 추진하는 것은 대종사의 뜻이 아닐 것이다. 진리를 향한 수행에 있어도 끝없이 스스로 의문을 가져야 하는데 하물며 공사를 함에 있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오늘도 대종사 말씀으로 살아가는지 내 뜻대로 살아가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스승과 제자, 출가와 재가가 서로 묻고 답하며 공부하는 교단이 되기를 희망한다.

/동창원교당

[2019년 9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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