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통해 천주교계는 북한 내에서
북측 카톨릭협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고,
북측 당국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지속적인 지원과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기독NGO들은 2000년대에 들어 긴급구호 수준에서 벗어나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 방북한 (사)평화3000 운영위원장 박창일 신부가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성체를 신도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박 신부는 천주교 사제 가운데 가장 많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평양의 장충성당에서 100차례 미사를 집전했다.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교우들은 천주께 어린양들을 위하여 하루 빨리 훌륭한 사제를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빌어야 한다." 북한이 발간한 교리서 〈천주교를 알자〉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정치적 목적이든, 종교적 목적이든 공식적으로는 북한이 천주교 사제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사제를 보내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천주교계, 북한에 사제 파견 추진
현재 북한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없다. 그 동안 방북했던 남쪽 신부들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카톨릭협회는 교황청에서 정기적으로 사제를 파견해 주면 본인들이 예비신자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치고, 사제들이 와서 세례를 주면 좋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카톨릭협회는 해외 천주교 단체와 교류를 하면서 비공개적으로 사제를 양성할 계획을 추진한 사례가 있다. 과거 동독과 중국, 일본, 홍콩 등의 천주교회에 2~3년 짧은 기간 동안 신학을 공부시켜 사제를 양성할 수 있는지 문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다른 해외 천주교 단체에서 평양이 서울대교구 관할이기 때문에 서울대교구 교구장에게 문의하면서 거절해 진척을 보지 못했다. 

2015년 12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 주교특별회원회 주교 5명과 사제들, 주교회의 실무진 등 17명이 장충성당을 방문했다. 당시 남북의 천주교 대표들은 매년 주요 대축일에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를 파견해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에 합의를 봤다. 하지만 그동안 남북관계가 단절돼 합의 이행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앞서 천주교계는 1995년 뉴욕에서 최창무 주교 등이 당시 북한의 장재철 위원장과 첫 공식 만남을 계기로, 1998년 최창무 주교가 서울대교구민족화해 위원장의 자격으로 방북해 두 차례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다. 이후 서울대교구와 북한 천주교회는 계속 교류를 유지했다. 다만 이때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종교 교류라는 측면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을 지원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러한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통해 천주교계는 북한 내에서 북측 카톨릭협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고, 북측 당국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지속적인 지원과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현재 천주교계의 가장 큰 바람은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교황청 공식 방문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구두 초청을 전달한 바 있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측으로 부터 서면으로 된 공식 초청이 있으면 명확히 답변드리겠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이기헌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은 최근 〈카톨릭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황님께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공식 초청이 있으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는 언질을 주신 만큼 우리 한국교회가 일치 속에서 교황님 방북이 성사되도록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고 교회 밖에서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라며 "평화의 사도로서 교황님의 역할은 지금 이 시점에서 엄청나게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올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교황의 방북설도 수그러들었지만 6월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사를 보내고, "평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해 북미관계의 진전에 따라 교황의 북한 방문 추진에 다시 힘이 실릴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북측신자들이 남측과 해외 개신교계의 지원으로 개축한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개신교계 통합적 대북인식·선교전략 필요 
한국 개신교계도 그 동안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개신교계는 1990년 한기총이 모은 '사랑의 쌀' 1만 가마니(800t)를 북측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남북관계가 화해와 경색을 오가는 가운데서도 인도적 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개신교계의 첫 쌀 지원 시점은 1989년 3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이던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 초청으로 방북한 뒤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될 정도로 남북 간 분위기는 험악할 때였다. 

남북 교회 간 교류 역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제3국에서 만나는 수준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기총의 대북 인도적 쌀 지원은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북한 지원에 나서도록 하는 기폭제가 됐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기류가 급물살을 타면서 주요 교단들은 대북 교류와 지원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200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95년 문을 닫은 평양신학원 재개원을 지원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신학원을 운영하고 목회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2005년부터 북한 봉수교회 재건축을 지원해 2008년 헌당 예배를 드렸다. 칠골교회 재건에도 도움을 줬다. 2009년 개교한 평양과학기술대학도 상징적인 성과다. 평양과기대는 수시로 긴장과 대립 국면이 조성되는 남북관계의 특성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통일 이후까지 멀리 내다보며 운영되고 있다. 특히 기독NGO들은 2000년대에 들어 긴급구호 수준에서 벗어나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월드비전이 2000년 평양에 씨감자 개발을 위한 온실을 설치하고 식량 자급에 도움을 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북지원사업의 대부'로 불렸던 고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이 생전에 밝힌 다음과 같은 이이야기는 개신교계의 대북지원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북한 사람들에게 굶어죽을 때 도와줬다는 믿음을 줘야한다. 후대에 '정치적 상황이 힘든데도, 자기들이 빨갱이라고 오해받더라도 돕더라. 예수쟁이 말은 믿을 만하더라'는 것을 일화처럼 기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통일을 위한 투자다." 물론 대북 인도적 지원과 평양 교회 신축과정에서 '북한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북한에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란과 비판이 거셌지만 남북 교회는 금강산과 평양 등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면서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이를 통해 북한의 교회와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상호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다만 대체로 한국교회는 주로 흡수통일 모델을 염두에 두고 통일과 선교를 계획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평화공존'단계에 접어들고, 남북간 종교교류가 이어지면서 북한 선교 모델과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북한 주민은 종교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교를 하려면 먼저 반기독교적(anti-Christian) 성향을 친기독교적(pro-Christian)인 성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북한의 변화에 따른 전략을 세우는 노력과 함께 각 교파간의 통일적인 대북 선교전략의 뼈대를 마련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통일선교전략'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성찰이기도 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ㆍ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ㆍ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ㆍ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ㆍ(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ㆍ현재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ㆍ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ㆍ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19년 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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