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어마인드캠프에서 우리말 도전 골든벨을 하고 있는 한울안중학교 학생들. 바르고 아름다운 말이 서로 공감하는 언어문화의 첫걸음임을 배운다.

[원불교신문=손시은 교수] 우리나라에 2002년에 번역 소개된 책,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그 실험 방법의 비과학성이나 터무니없는 근거 제시로 인해 유사과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파나 고구마, 바나나 등을 대상으로 그와 비슷한 실험들이 끊임없이 재현되는 이유는 "욕설이나 부정적인 말을 쓰지 말고 긍정적인 좋은 말을 쓰자"는 주제의 교훈성만큼은 틀림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 에모토 마사루는 눈 결정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8년 동안 물 결정 실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사랑', '감사' 같은 긍정적인 단어에는 물의 결정이 아름다운 육각형으로 나타난 데 반해 '악마', '바보', '짜증나', '죽여버릴 거야'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결정의 모양이 깨지고 색도 탁해졌다고 설명한다. 물에게 어떤 말과 음악을 들려주고 어떤 글씨를 보여주는가에 따라 물 결정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MBC 방송에서는 한글날 특집으로, 언어가 가진 힘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유리병 두 개에 밥을 담아 한쪽에는 '고맙습니다'라고 쓰인 종이를, 다른 한쪽에는 '짜증나!'라고 쓰인 종이를 붙이고 헤드폰을 씌운 후 그 단어를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4주 동안의 실험 결과 '고맙습니다'를 들려준 밥에서는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났고, '짜증나!'를 들려준 밥에서는 곰팡이가 피고 썩은 냄새가 났다.  

말이 가진 힘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이런 유의 실험은 최근 인지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바르고 아름다운 언어문화 정착을 목표로 언어인성 프로그램 개발을 궁리 중인 필자에게는 반가운 일인 한편 두려움도 크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의 위력
말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말의 지배를 받는다. 말은 마음에 거는 주문(呪文)과 같다. 그 주문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현실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마법이 되기도 하고, 불행과 절망을 불러오는 저주가 되기도 한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펜싱 에페 종목에서 극적인 대역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박상영 선수의 이야기는 자기 신뢰와 긍정 마인드가 만들어낸 기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3 대 9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박상영 선수에게 들려온 한마디, "할 수 있다" 긴장감이 흐르는 적막을 깨뜨리며 관중석에서 들려온 응원의 외침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박상영 선수는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할 수 있다"는 말을 되뇌기 시작했고, 이어진 경기에서 놀라운 기세로 득점을 이어나가 마침내 15:14로 역전승했다. 

현실적인 조건으로만 따진다면 패배가 확실했던 경기였는데, 말 한마디에 승패가 뒤바뀐 것이다. 이것은 '할 수 있다'는 응원과 격려를 보낸 누군가의 진심이 박상영 선수의 마음에 전해졌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다. 만일 '할 수 있다'는 그 응원에 간절한 진심이 담기지 않고 상투적으로 내뱉는 형식적 구호에 불과했다면 박상영 선수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긍정적인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에 진심이 담겼는가 그렇지 못한가이다. 인간관계에서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렇다보니 말하기 방법과 기술에 관한 책들은 쏟아져 나오고 스피치교육 전문학원을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의 언어예절은 나아졌는가?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기사의 내용이나 거기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형국이다. 오히려 듣는 귀는 닫은 채 현란한 말재주만 과시하고 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현학적인 수사들이 남발되다 보니 잘못한 당사자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가 "유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도 아무렇지 않은 지경이 되어버렸다. '유감(遺憾)'이란 '마음에 차지 않아서 섭섭하거나 불만스러운 느낌'을 뜻하는 말이므로, 유감을 품거나 표하는 주체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 정신적 혹은 물질적 피해를 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된 말하기에 진심이 담길 리 만무이다.

시대가 어지러우면 말도 어지러워진다. 현대 국어에 된소리, 거센소리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도 사회언어학적 측면에서는 불길한 징조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은 언어적 아노미(anomie, 무규범상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소위 기득권의 말하기 행태를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언어적 아노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말이 냉수 한 그릇만 못하다
우리의 말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필자는 박상영 선수의 사례를 정면교사로 삼고 싶다. 박상영 선수가 되뇐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용 구호가 아니었다. 심각한 무릎 부상과 패배를 앞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기 위한 자기와의 다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싸움으로써 자기 자신과의 신의를 지켜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말을 실제로 행했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있지 승패에 있지 않다. 승리는 그저 덤일 뿐이다. 설령 패했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박상영 선수는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응원해준 모든 사람들과의 믿음을 지켜냈다. 

말하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공해나 다름없다. 흔히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데, 말이 '홍수'가 되는 이유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이 넘쳐나 우리를 해치는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진심은 언제나 실천을 통해 그 말에 책임지는 태도로 나타난다.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은 그 내용이나 수사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결국은 거짓이다. 

북한 속담에 "빈말이 냉수 한 그릇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보다는 목마른 사람에게 찬물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번지르르한 말치레로 남을 현혹하지 말고 실질적인 도움 행위를 하라는 말이다. 또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말을 하는 데에는 어눌하게 하고 행하는 데에는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 訥於言 而敏行)"라고 했다. 군자는 자신을 성찰하고 실행 여부를 헤아려서 신중하게 말하기 때문에 말이 어눌한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해서 한 말이기 때문에 실천하기 쉽다. 

지금은 제목도 작가도 기억나지 않지만 필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은 소설이 있다. 평범한 가장이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말의 허위성을 깨닫고 "이제부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쓴 소설이었다. 수년의 함구 생활 끝에 남자는 '이제부터 다시 말을 하겠다' 결심하지만 이미 혀가 굳어버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서 어린 필자도 말을 하지 않기를 시도해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적 함의가 깊었던 이야기 같은데 다시 찾아 제대로 의미를 음미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아마도 언어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필자 연배면 대부분이 어릴 적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웠던 말이 있을 것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가 그것이다. 마술사들의 주문으로 알고 있던 그 말을 불교경전 〈천수경〉의 첫머리에서 발견했을 때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입으로 지은 죄업을 참회하여 깨끗이 씻어내는 진언(眞言)이다. 어른들 말씀에 입으로 온갖 재앙이 다 들어오는 법이니 항상 입조심하라 하셨는데 또 한편으로 이 진언을 친구들과 놀면서 재미삼아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하고 소원을 빌기도 했으니, 정산종사님 법문처럼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이니, 잘못 쓰면 입이 화문이지만 잘 쓰면 얼마나 복문이 되는가."

좋은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마음이 좋아야 사람이 좋고, 사람이 좋아야 말이 좋게 마련이라고 했다. 좋은 마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바로 신중한 말과 드러나는 행동이다. '언행일치' '눌언민행', 말보다 실천이다. 

손시은 교수

 

 

 

 

 

 

 

 

 

 

 

ㆍ전북대학교 문학박사
ㆍ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2019년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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