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김원도 종사

[원불교신문=안세명]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있나니, 침착해서 자기를 이기며, 생각해서 길로 나가며, 근면해서 보은해야 하느니라." 연산 김원도 종사(淵山 金元道·80·개봉교당)는 50년 전 신도안에서 받든 대산종사 법문이 일생의 좌우명이 되어 지금도 지갑에 넣고 매 순간 꺼내 본다. 가정과 회사, 교단사에 임하면서 침착·생각·근면의 철학이 그의 정신에 견고한 의두로 새겨져있다.

직접 찾아간 전주지부 교리강습회
그의 입교는 특별하다. 현 교동교당이 원불교 전주지부였을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 중학교 3학년이었다. 어느 날 저녁 8시경 좁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데 교당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 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품격 있는 한 여성이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맨 뒤에 서서 듣고 있던 그에게 유해일 주무(김혜봉 교무 모친)가 자리를 양보해 끝까지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원불교에 인연을 맺게해 준 유 주무의 은혜가 고맙다.

그때의 여성 강사는 구타원 이공주 종사였다. 교리강습 주제가 인지미덕(忍之美德), '참는 것이 덕이 된다' 였는데 내용도 훌륭했지만 서울 말씨에 인품이 범상치 않았다. 교리강습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입교했고, 그도 4박5일 강습 중 3번을 참석했다. 그러나 입교는 6년 후 오성수 교무의 연원으로 했다. 지금도 왜 주위에서 입교를 권하지 않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원불교 대학생 교우회·청운회 창립 발기
원기46년, 그가 입학한 전북대학교에는 종교 동아리 중 원불교만 없어 의협심이 일어났다. 서둘러 각 단과대에 학생들을 모집하니 교도들이 상당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 동아리를 만들려면 지도교수 2인이 필요했다. 국회의원과 수위단원을 역임한 박동현 교수와 신흥종교를 연구하며 원불교에 호감을 가졌던 이강오 교수를 초빙했다. 전국 대학 중 최초로 원불교 교의회를 창립하게 됐다. 비록 초대회장은 3학년 법대생이었던 김봉성 선배가 했지만, 그가 창립부터 발기까지 도맡아 했다. 

그는 삼천리자전거 대전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청년회와 일반교도 사이 청장년 모임으로 청운회를 시작했다. 그는 남대전교당을 중심으로 대전청운회를 창립했고 회장을 맡았다. 그 뒤로 서울에 올라와 중앙청운회장과 보은동산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대산종사께서 '청운회는 교단의 장자'라고 소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지금의 청운회는 그러한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청운회는 출범 당시 기독교의 YMCA·YWCA와 같이 소태산 대종사의 이념과 사상을 원불교 울타리가 아닌 대사회적운동을 실천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또한 남녀 교도가 함께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단 내 활동으로 한정 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참 문명세계를 선도한 청운회의 진취적 활동을 기대했다.

대산종사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정산종사께서 열반하신 1962년, 회갑기념 인사차 총부를 방문했다. 정산종사께서는 병환중이라 겨우 인사만 드렸는데, '사람이 앉아 계신건가. 세상에 저런 분이 계실까'할 정도로 성안이 참으로 훤하고 온화했다. 그가 법의 스승으로 모신 어른은 대산종사다. 남대전교당 최도선 교무가 어찌나 열성적인지 대산종사를 뵈러 신도안을 수시로 찾았다. 신심이 난 그는 여름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대산종사가 계신 곳을 따라 다녔다. 그렇게 14년을 왕래했다.

그의 일생엔 몇 가지 큰 신앙체험이 있다. 삼천리자전거 근무시절, 대기업 간부들에게 판매촉진을 위한 연수가 14박15일간 일본에서 있었다. 당시엔 외국을 간다면 양복도 새로 맞출 정도로 흔치 않은 기회였다. 더욱이 회사대표로 가게 되니 무척 설레였다. 그러나 여행 가기 전 꿈에 대산종사가 나타나 큰 바위덩어리를 들어 그의 얼굴을 수차례 치니 유혈이 낭자했다. 그런 불길한 꿈을 꾼지 이틀 후 회사 사정으로 그만 연수를 못 가게 됐다. 원망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며칠 후 뉴재팬 호텔에 머물고 있던 45명의 간부들이 화재로 44명이 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그제서야 그때의 꿈이 선몽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후일에 알고 보니 지방대 출신였던 그를 견제하던 선임 간부의 불만 표출로 회사에서 그를 보내지 않은 사실을 듣게 됐다. '은생어해(恩生於害)'였다. 그 일로 대산종사에 대한 신성이 더욱 커졌다. 신도안 동용추에 산책중이던 대산종사를 찾아 오체투지를 했다. 영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신앙체험은 원불교학과생들로 구성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돕기 국토순례단의 사무여한 정신에 그는 감복됐다.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한 달간 싸이클로 전국을 순례하며 성금을 모금하고, 기도와 풍물을 치고, 기관을 방문하는 초인적 일정은 전문 선수들도 못하는 일이었다. 몇 번을 반대해도 의지를 꺾지 않는 예비교무들의 사무여한의 서원을 보고 그는 교단사에 가장 위대한 일이며 자랑거리로 평가한다. 자살율이 세계1위인 한국의 사회상을 볼 때 400여 명의 어린 생명을 살려낸 국토순례단의 헌신은 교단 일을 해나갈 때 그의 옷깃을 여미는 결연함으로 자리한다.

마지막 소명으로 불태울 유린보은동산
"나는 3대 독자다. 살아가면서 부모에 대한 은혜가 너무 지중하고 깊다. 효를 다 못하고 열반한 부모를 생각하며 이곳 유린보은동산에서 부모보은의 강령인 '무자력자 보호'의 도를 실천할 것이다." 그는 좌산상사의 경영법어인 '지자본위의 인사, 자리이타의 거래, 정법정도의 원칙, 안여반석의 조치'를 운영의 원칙으로 삼는다. 4차산업혁명시대, 사회복지 환경도 첨단을 걷는 만큼 먼저 구성원들과 합심해 주인의 심법을 키우고 실력을 키우는데 집중할 예정이다. 유린보은동산의 역사가 깊은 만큼 사회적 공신력도 튼실하다. 최근 열반한 한지성 이사장을 비롯한 역대 운영진들의 헌신적 경영에 감사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안전하고 편리한 시설, 지역민과 함께하는 선진적 프로그램으로 거듭나는 시설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는 마지막 소명을 불태우려 한다.

교화, 대종사 정신으로 돌아가야
"교역자부터 교화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근래 종교의 위기를 강조하며 사회적 여건과 환경이 종교의 역할이 작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함을 지적했다. 지금과 같이 교화의 잘되고 못되는 기준을 입교수와 법회출석수에 한정하는 패턴에서 과감히 벗어나 교화단과 훈련을 통해 영성을 강화하는 흐름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다. 

그는 "대종사께서 대각하시고 교화하실 때 이 세상이 낙원으로 가는 것을 전망하고 교법을 펴셨지 당신 만을 따르는 교도 수에 목표를 두지 않았다"며 소태산의 경륜과 포부가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의 신앙·수행 행위가 확대되는 낙원건설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이제 원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교도 수만 보고 4대종교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축적된 적공의 힘이다"며   "교도들은 오롯하고 심도있는 실지훈련에 목말라 있다"고 상시훈련 강화에 중심을 맞춰 교화해야 함에 힘을 실었다. 

재가교도에게 과감한 참여기회 줘야 해
"이럴 때일수록 재가들의 참여기회를 많이 줘야 교단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일을 한다. 교단의 의사결정은 물론 교당과 총부정책의 운영이 출가위주로만 하면 누가 주인이 되겠는가." 그는 4차산업혁명시대의 핵심 키워드를 '공유'로 들며 서로 함께 느끼고, 함께 해결하는 것이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힘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한다. 세계적 택시회사인 우버를 보면 택시 한대도 없는 회사가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다. 재가출가가 합력해야 좋은 선택과 실천의 길이 나온다. 출가만 주인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재가들에게도 주인이 될때 능동적이 되며, 그러한 책임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은 참회로, 다음 생은 서원으로
그는 "나의 공부표준은 사심 없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교단으로 돌리자이다. 교단 일에 임하면서 계산하지 않았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적극적으로 풀어가자는 생각 뿐이었다"며 "다음 생은 재가로서 대종사의 경륜과 포부 실현에 필요한 공심 갖춘 큰 사업가로 일하고 싶다"고 영생토록 교단의 주인으로 살 것을 서원했다. 
또한 그는 "요즘엔 비우는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잘못 맺어진 인연들과 참회로써 다시 만난다. 그동안 일을 하다 막힌 인연들과 회심의 심법과 기도로써 풀어가고 있다. 이 생은 참회로써 비우고, 다음 생은 서원으로 채울 것이다"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 곳간을 내비쳤다. 
오늘도 그는 법신불 사은께 기도한다.  "상 없이 일하고 매사를 공부 기회로 삼자. 정진적공이 스승에게 보은하는 길이다."

■ 연산 김원도 종사 약력
원기97년 대호법 수훈
원기100년 종사 수훈
현 (주)와이즈비젼 회장
현 사회복지법인 유린보은동산 이사장

[2019년 10월4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