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인화 교무]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종교의 구성 요소이자 발전 동력은 기도와 교육, 그리고 문화와 교제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은 이 네 가지 요소의 균형과 조화를 통한 교화 활성화를 주제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화는 제가 숨 쉬고 밥 먹고 기도하고 목탁을 치고 때로 목 놓아 사은님을 부르짖는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적 소망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성숙이 시시각각 더해져가고 교당과 회상이 나날이 발전하여 사람과 세상이 개벽되는 모습을 당대에 보시기를 염원하고 계신가요.

타종교의 성장 사례
안타깝게도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교화는 생각만큼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해답을 좀 더 쉬운 곳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바로 우리 이웃 종교들의 사례에서 찾아 보니, 그것은 좀더 확연해졌습니다. 개개 단위의 독립성이 확보된 교회의 경우, 성장이 활발한 곳과 더딘 교회는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기도가 뜨겁고 교육이 체계적이며 음악이 세련된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소통이 원만한 교회, 성도들간에 교류가 활발한 교회는 개인의 신앙도 성장하고 교회도 부흥, 발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제와 수녀들이 따뜻한 사랑과 헌신으로 교우들의 끈끈한 유대를 이끌고 교리 교육과 수준 높은 문화로 미사 분위기를 만든 바탕 위에서 신앙 선배들의 배려와 보살핌이 있는 교회는 종교의 '노화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는 신앙공동체가 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 같은 교회 부흥의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볼까요. 기도가 뜨겁다는 것은 참선, 명상으로 신앙의 근기를 깊이 있게 바루는 일이고, 교육이 체계적이라는 말은 교리와 마음 공부를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실체적으로 적용하여, 습관이 변할 만큼 위력있는 속 깊은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음악은 기도이자 기쁨과 나눔의 축제입니다. 음악만으로도 영성과 예배 그 자체가 되는 고차원의 문화입니다. 이제 우리의 종교문화와 표현 방식도 질과 양적으로 고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성을 깨우고 정서를 정화시키는 시와 노래가 법당을 뜨겁고 성스럽게 달구어 마침내 영성적 BTS가 꽃피는 세상이 바로 대종사님께서 바라시던 풍류 세상이 아닐런지요.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는 헬라어로 교제와 친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신의 교제와 인간 사이의 친교를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끈끈한 교류와 따뜻한 나눔 속에는 화해와 용서라는 미덕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고 사람 간에도 잘못을 뉘우치면 서로 품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사은님과의 끝없는 반조와 교도들간의 끈끈한 화해와 연대가 동포은 수준으로 견고해져야 합니다. 영산회상에서 만난 법연이자 운형수제와 같은 억겁의 인연을 오늘의 현실에 살려서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위기가 강물처럼 흐른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내적 성장과 교당의 확장으로 이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열정은 편중을 지향한다
자동차는 네 바퀴가 필요합니다. 하나라도 없거나 문제가 생겨도 제대로 굴러가지 못 합니다. 종교도 이와 같습니다. 기도, 교육, 문화, 교류 이 네 가지는 종교의 기본 요소이자 동력입니다. 어느 것이 우선적이거나 비중이 큰 것 또한 없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교당은 정체되고 우리들의 성장은 더뎌질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생장기에는 교리의 확립과 교육이 우선시 되거나 교조의 능력이나 기도가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곤 하였습니다. 원불교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열정의 시대였다고나 할까요.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르네상스 시기를 꼽는다면 1970년대 전후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이 시기에는 교회나 절이나 웬만하면 잘 되었고 신흥종교도 왕성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기도와 교육에 편중해도 사람들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자 세상과 사람은 변했습니다. 디지털 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이른바 개벽이 일어난 거죠. 사람들은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타인의 사례를 수집하여 경험할 뿐 아니라 영성을 지도하거나 기도를 중개할 지도자가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바야흐로 신도가 성직자를 걱정하는 세상이 온 거지요.
 

사은님과의 끝없는 반조
교도들간의 끈끈한 화해와 연대가 견고해야


치우친 열정은 조화롭지 못하며 
원만한 개인·가정·교당 되기 어려워


기도·교육·문화·교류는 
각각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나

균형과 조화 앞에 놓인 우리
우리는 이미 균형과 조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에 치우치는 열정은 매력적이지만 조화롭지 못 합니다. 원만한 개인과 가정, 교당이 되기 어렵습니다. 가령, 우리가 교육에 해당하는 마음공부와 교리공부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기도나 문화, 교제에 소홀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인문교육을 하거나 윤리교육을 하는 아카데미나 학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매사의 공부와 문답은 아주 바람직한 신앙인의 도리이죠. 하지만 이러한 공부에 상응하는 기도가 부족하고 노래가 끊긴 채, 도반 간의 교류가 원만하지 못한 마음공부는 자칫 삭막한 관념이 지배하는 수도원 같거나 교육의 권위가 지배하는 도판으로 흘러서 매마르고 차가운 법잔치로 치우칠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베토벤이나 방탄소년단 수준으로 잘하는데 마음공부와 기도를 등한시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제대로 잠자고 호흡하고 적절하게 놀며 운동하고 레저와 여행도 잘해서 사람들은 그들을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부러워 할만 한데, 기도와 공부가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들은 자칫 한량들의 놀이터나 고급 사교의 장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걸으면서 행선하고 누우면 와선하고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 묵언 수행을 하고, 앉으면 좌선이요, 자리만 있으면 요가로 수행하며 기도와 명상만 제대로 하면 신앙생활이 모두 해결된다면서 참선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플럼빌리지나 떼제공동체 같은 명상공동체나 기도원 분위기가 되겠지요. 

대체로 우리의 신앙의 축은 기도와 문답이라는 이 두 가지 공부에 방점을 찍어 온 게 사실이지요. 이렇게 공부와 수행과 생활을 병진해 오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교화 현실은 배가 고픕니다. 기도와 문답!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될 것 같죠. 그러나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느라 문화와 교류에 소홀하면 어떻게 될까요. 결과는 의외로 심각합니다. 문화가 허약하면 개인의 정서와 집단의 열정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재미를 잃게 됩니다. 과거 산속에서 도 닦던 시절의 산중불교로 회귀하거나 수행자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의미 있고 점잖은 종교인, 근엄한 수도인, 보기 좋은 도인은 될지 모르나 재미의 역동성이 떨어지므로 교화에는 한계가 생깁니다.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지요. 특히 현대인들은 재미와 의미가 한 데 어우러진 역동적인 삶에 목말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에 답할 때가 된 거죠.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문명과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에서 만난 인연이란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문화적인 역량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교당에서 교제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며 살아갑니다. 

주변의 신앙 엘리트들도 지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독선적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 관계, 사회성이 약하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잘 어울리다가도 하찮은 생각의 차이나 말 한마디, 행실 하나로도 돌아앉고, 척을 짓고, 신앙 공동체와 생이별을 해서 서로를 긴장하게 하는 일들이 허다하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신앙의 결실을 관계성에 두기도 합니다. 예리한 발상이며 지적입니다.

교화는 열정과 조화의 산물
기도ㆍ교육ㆍ문화ㆍ교류 이 네 가지는 각각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나입니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각각 뿌리와 줄기, 잎과 꽃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 열매는 바로 교화입니다. 교화라는 신앙 완성체를 향한 각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화롭게 발전시켜나가야 할 이 시대, 우리의 신앙과업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네 가지 영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서 개인과 회상의 신앙과 교화를 위해 힘차게 매진합시다.

/강남교당

[2019년 10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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