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하 교무 / 샌프란시스코교당

[원불교신문=이성하 교무] 며칠 전 교당 선방에 나오는 분들과 한국에 들어와 익산 총부를 순례할 기회가 있었다. 익산 총부는 예비교무, 원로 교무, 종법실, 교정원과 인근에서 근무하는 다양한 교무들이 함께 만든 공동체이기 때문에 면면히 흐르는 초기 정신을 이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늘 거기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총부를 순례하고 둘러본다는 것은 그저 원불교의 초기 교단사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 교단 초기의 맥박을 그 자리에서 느끼는 일이었고 총부에 간다는 것은 언제나 기운을 담뿍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정원의 일부가 빠져나가고 예비 교무의 수도 현저히 줄다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는 시절이 도래한 듯하다. 장엄 가운데 사람 장엄이 제일인데 사람이 사라지니 익산 총부의 맥이 절반은 희미해지지 않을까 지레 걱정이 깊어진다. 서울 총부 시대가 열리면서 교단이 한국 중심부에 모습을 드러내며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읽고 그에 맞춰 변화와 개방을 모색해가는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다. 

만물은 원래 고정된 바가 없고 변할 뿐이니 시대에 따라 교화 방편은 유연할 일이지만 전법성지 익산 총부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익산 총부는 대종사 이하 역대 종법사가 교화를 주재한 곳이며 아직도 곳곳에 원불교 초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익산 총부는 오랫동안 모든 재가출가 교도의 신심이 향하던 곳이었고 그곳에 살았던 모든 교역자들의 초발심과 서원과 삶의 역사가 새겨진 정신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깊은 서원과 오랜 기도가 뭉쳐 맑고 생생한 기운이 감돌던 성지였다.

총부정문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차들이 큰 소리로 오가지만 총부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차분하고 정갈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소태산기념관이 생겨서 기쁘기 그지없으나 한편 언제나 돌아갈 수 있던 고향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익산 총부가 지닌 정서와 기운을 소태산기념관으로 담아갈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집단적으로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고착된 생각이 깨지는 시점이기도 한 것 같다. 익산 총부의 주인은 원불교 교도요, 원불교인만의 정신의 고향으로 알고 살아왔으나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

정말 고귀한 인류의 유산에는 따로 정해진 주인이 없다. 만인이 더불어 주인이고 전 인류가 더불어 상속자가 된다. 익산 총부의 주인, 익산 총부의 상속자가 우리 원불교 교도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이 우리만이 즐기는 우리의 성지가 되어서야 대종사님의 뜻을 헤아리는 제자가 되겠는가. 이번에 함께 온 순례객들과 창경궁 안뜰을 둘러보면서 옛 왕들은 그들만의 정원을 오늘날 세계의 여행자들이 걷고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한국어도 아닌 외국어로 그들의 삶에 대한 설명을 들으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만인이 순례를 떠나는 곳이었겠으며, 바티칸이 처음부터 오늘의 바티칸이었겠는가. 세월이 흐르고 흐르며 그 정신의 유산을 잘 지키고 물리적 공간을 자기 집안을 넘어 만인에게 개방한 결과 이제 그곳은 인종과 종교를 떠나 세계인의 성지, 우리 모두의 성지가 된 것이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영어로 옮기면 개벽이란 단어는, 영어로 번역할 적확한 단어가 없어서였겠으나, 어쨌든 열다라는 의미의 opening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Great Opening" 크게 열림이다. 익산 총부의 문을 익산 시민에게뿐 아니라 만대중에게 대개방을 할 시절이 아닌가 싶다. 종교적 접근이 아닌 문화적 역사적 접근으로 어떻게 열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것 같고, 그 방법은 우리의 지성을 모아서 할 일이다.

익산 총부가 여전히 그 정서와 기운을 담은 곳으로 남으며 동시에 만인이 주인이 되는 곳이 되어야 할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성지의 정신은 수호하고 문호는 널리 개방할 차례이다.

/샌프란시스코교당

[2019년 10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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