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익선 교무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종교와 정치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먼저 종교는 모든 존재와 그 환경을 하나의 완성된 세계로 보고, 전일한 입장에서 파손된 인간의 삶을 치유해 간다는 것에 있다. 정치는 한 세계나 단체에 질서를 세우고 통합하며, 그 세계의 갈등해결을 위해 노력해가는 사회문화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의 역할을 이렇게 본다면, 같은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처럼 자모와 엄부의 공동목표는 낙원세계 건설에 있다.

한편 종교는 보다 내적인 세계, 즉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다룬다. 정치는 그러한 마음의 행로가 삶으로 나타난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정치문제를 역으로 풀어간다면, 마음을 다루는 종교세계로 귀결된다. 마음이 현실로 드러나고, 타자들과의 관계로 확대된다면 정치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일요일에 교당에서 법회를 보지만, 법회가 파하고 세상으로 나가면 투표의 장으로 가거나 주가가 요동치는 현실 정치·경제의 영역을 마주대할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의 영역이 우리 인간 삶의 기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를 종교는 체고, 정치는 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정교동심(政敎同心)은 세상의 문제를 체용이 하나가 되어 해결해 간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새의 양 날개인 양익(兩翼), 수레의 두 바퀴인 양륜(兩輪)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중세유럽의 황권시대와 같이 종교가 정치를 이용하기도 했고, 일본의 무사정권처럼 정치가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의 결과, 현대에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현재 지역분쟁의 60% 이상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종교적 최고 계율인 불살생의 정신은 정치의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하긴 종교는 대량살상을 가져온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도 못 막았다.

한 국가나 세계 전체는 갈수록 분열되어 가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는 공업(共業)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는 스스로 종교가 되어 힘의 논리로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세계 또한 여전히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횡행한다. 땅에 물을 부으면 여러 갈래로 퍼져가듯이 분열에서 분열로 갈 뿐 정치는 세계를 통합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병맥을 치유하기 위해 종교의 역할이 새롭게 요청되고 있다. 위기의 시대야말로 종교 본연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길에 종교가 앞장서 정치사회적 인간의 탐욕과 무지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나아가 무의미한 전쟁처럼 인류의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타락한 정치윤리를 회복하게 해야 한다. 이어 대중의 컨센서스(의견의 일치)를 모으고, 이니셔티브(지도적 권위)가 확보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정치가 길을 잃을 때, 종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정치력을 세우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인류가 피를 흘리며 쌓아온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인권과 생명 등 인류의 공동가치에 대해 어떤 정치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와 정치가 충고하는 친구이자 서로의 교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광대학교

[2019년 10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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