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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어떻게 소태산을 만날 수 있었나
도산 안창호는 어떻게 소태산을 만날 수 있었나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9.10.18
  • 호수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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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3.1운동 재조명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이 12일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3.1운동 재조명' 학술회의를 진행했다.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개최한 이번 학술회의는 익산을 비롯한 전북지역의 독립운동사가 그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가 당시의 시대상황, 언론활동, 민족운동 등 여러 측면에서 본격적인 연구조사가 이뤄져 익산지역 독립운동에 관한 첫 학술발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불법연구회 창립 시기와 장소가 당시 이리 지역이라는 점에서 초창기 교단 활동이 단순한 종교성에 그치지 않고 민족운동과 그 맥을 같이했다는 사료와 정황들이 제시돼 주목을 받았다.

기조강연으로 '익산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위상-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위하여' 주제로 발표한 박맹수(법명 윤철) 원광대학교 총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이리 지역은 일본 군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을 정도로 농업식민정책과 토지수탈이 극도에 달했던 곳이었다"며 "당시 이리 지역에도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 진행이 있었지만, 소태산 대종사가 전개했던 방식은 제4의 독립운동으로 '영혼의 탈식민지화'라고 평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이리역은 일제가 수탈한 쌀을 군산항으로 효율적으로 이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점에서 이리를 비롯한 전북지역은 가장 첨예한 일제 경제침략 현장이었다. 그러나 이리에 불법연구회를 창립했던 소태산 대종사와 회원들의 정갈한 수도생활과 무료의원 설치, 보화당에서 가난한 환자를 위해 무료로 약품을 나눠주는 행보는 민족 언론지는 물론 조선총독부 어용지였던 <매일신보>조차도 칭찬일색의 기사를 보도한다.

지금까지 교단에 알려진 1928년 <동아일보> 기사보다 4년 앞서 최초로 '이리 불법연구회 창립' 기사를 보도한 <시대일보>를 발굴해 낸 박 총장은 "민족 언론지인 <시대일보>나 <동아일보>가 불법연구회 활동과 대종사 동정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 사실은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 지식인들이 불법연구회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며 "특히 조선총독부 어용지였던 <매일신보>조차도 불법연구회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으로 지속적인 보도를 했다는 점에서 재일사학자 조경달 교수(일본 치바대학)는 '불법연구회는 신흥종교 교단과 전혀 달랐다. 불법연구회는 도시 지식인 사회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고 평했다"고 말했다. 또한 도산 안창호가 불법연구회를 방문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칭찬하는 이야기가 실린 <대종경> 실시품 45장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과 경위에서 진행됐는지도 밝혀져 큰 관심을 받았다.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문화·언론활동'을 발표한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공학과 교수는 "3.1운동 이후 이리지역 독립운동 핵심 인물로 임종환, 임혁근, 임영택, 배헌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며 "자유롭게 취재를 다닐 수 있고, 많은 정보를 습득하며, 지식인으로서 사상운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는 신문기자의 장점으로 당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운동가들은 대부분 기자로 위장했다"고 말했다.

김귀성(법명 혜광) 원광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토론문에서 "<동아일보>기자 출신의 배헌은 도산 안창호가 익산 총부를 방문했을 때(1935년 추정) 함께 동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며 "기자 배현(동아일보 이리지국장)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가 불법연구회를 방문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동행한 인물로는 배헌 외에도 이창대 매일신보 지국장, 조기하 조선일보 기자, 김철중 중외일보 편집국장, 이리경찰서 고등계 형사 등이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발표한 오대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3.1운동 결과 청년·노동자·농민들로 주축이 돼 각 부문 운동을 추동하는 단체들이 결성됐고, 조직된 단체들은 국내 사회운동을 주도해 갔다"며 "이들은 친목과 계몽 운동 성격에서 소작권 회복운동, 소작인·노동자 권익 옹호, 임금인상 요구 및 파업운동 등으로 심화됐다"고 말했다. 특히 1922년 10월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은 1923년 2월 서울청년회 내에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을 설립하고, 고려공산동맹은 합법적 사상단체 서울청년회를 통해 전국적인 청년단체 조직을 추진했던 정황은 그 당시 청년단체들이 대체로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됐다. 이는 <대종경> 전망품 9장·10장에 등장하는 서울 어느 청년단체가 모 신흥종교 비행을 성토하며 소태산 대종사에게 "현지에 내려가 박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부분을 시대적 상황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의 '우정 임규의 생애와 민족운동', 김봉곤 원광대 연구교수의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학생운동', 허남진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의 '익산지역 독립운동과 종교', 정성미 원광대 교수 '익산지역 독립운동사적지 현황과 활용방안'이 각각 발표됐다.
 

[2019년 10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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