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과 포부는 <정전>에 담겨 있다. <정전>은 소태산의 대각에서 길어 올린 샘물이다. 그러므로 <정전>을 우회해서는 소태산의 본의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전>은 깨쳐야 할 의두이며 인생의 지침이기에 우리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자산이면서 풀어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지점이 있다. 그것은 소태산의 대각은 ‘일원상의 대각’이라는 것이다.

일원상은 ‘한 생각에 넘지 않는’ (<원불교교사>) 하나로(一) 두렷한(圓) 자리(相)이다. 즉 모든 의심이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또한 한 생각으로 두렷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이 ‘한 생각’의 당처가 바로 하나로 두렷한 일원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전>은 소태산의 대각인 일원상으로 풀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일원상에 근원하지 않는 <정전> 풀이는 소태산의 본뜻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일원상의 기반이 허약한 <정전> 공부는 공부할수록 사용법에서 어긋나 고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전>은 일원상에 근원해 있다. 즉 ‘교리도’를 보면 일원상을 머리로 하여 인과보응의 신앙문과 진공묘유의 수행문으로 펼쳐지며, ‘교법의 총설’에서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라 했고, ‘일원상서원문’에서는 일원상을 체 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와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와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결국 ‘마음을 잘 쓰는 공부’를 위해서는 일원상을 체 받아야 한다. 마음공부는 일원상에 근원한 마음공부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회보> 제33호에서 ‘정신문명 즉 용심법(用心法)’이라고 천명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태산의 용심법은 일원상에 근거한 마음공부라는 것이다. 정신문명은 일원상으로 마음을 작용하는 용심법인 것이다.

정산종사는 <회보> 제38호 ‘일원상에 대하여’라는 논설에서 염불·좌선도 ‘망상 없는 일원상’으로 오롯한(專一) 마음이 되자는 것이며, 일기를 하고 유무념을 대조하는 것도 일원상에 반조하는 실행 과정이며, 상시응용주의사항의 응용할 때 주의사항도, 응용하기 전 주의사항도, 모든 일을 처리한 뒤에 대조하는 주의사항도 다 ‘대도(大道)’인 일원상을 대중하는 공부라 한다. 이처럼 상시훈련법인 상시응용주의사항에 있어 일원상을 대중하는 공부를 놓치면 소태산 대종사의 수행 정로(正路)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시훈련법은 일원상으로 수행을 훈련시키는 공부이다. 정의도 양심도 자기 입장의 정의와 양심이 되기 쉽다. 그러기에 정산종사는 ‘성품에서 나타나는 양심의 소작(所作)’이요 ‘진리에서 활용되는 정의의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원상인 성품과 일원상인 진리에 근원한 마음공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일원상으로 읽는 정전’이란 제목으로, <정전>을 일원상의 시각으로 읽어보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정전>을 일원상에 기반하여 일원상으로 해석하는 ‘다시 읽기’를 하려고 한다.

/나주교당

[2019년 1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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