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경열 교무]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원불교를 창시하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도 원불교라는 종교를 열게 된 동기가 바로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낙원이란 행복입니다. 일체생령을 행복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지요.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분들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하며 “일상에서 행복 찾기”라는 주제로 함께 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지인으로부터 엽서를 받았습니다. 그 그림엽서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현자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며, 강자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며, 부자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 교도님들은 현자, 강자, 부자… 어떤 사람에 관심이 있나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부자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라는 대목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왜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부자일까? 이 물음에 대한 의문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연마해 보았습니다. 교도님은 지금 부자입니까? 자기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타인과 비교해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 환경 조건에 상대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 즉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요 만족의 주체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이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이 있습니다. 이 답은 신조어입니다. “욜로가 가고 소확행이 왔어요.” 여기서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약자)란 ‘한 번뿐인 인생, 지금을 즐기자’라는 뜻, 소확행(작을 소, 확실할 확, 행복 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욜로 트렌드가 과도한 소비로 연결되니 결국에는 생활이 어렵게 되어 이제는 소확행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지요. 행복의 기준을 사회가 아닌 개개인이 정하는 것입니다. 소확행을 찾는 요즘 세대는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어찌 보면 지금 주어진 자기 삶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태도에 행복이달려 있다고 봅니다.

행복은 집이나 자동차 같이 비싸고 갖기 어려운 대상을 소유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아닌, 지금 현재 시간을 내가 어떻게 온전히 쓰는지, 인생과 자연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 부여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소확행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일상적으로 자주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지요. 
우리 교도님들 요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산삼은 땅 속에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줄기와 잎이 땅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삼을 캐는 일이 가능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대신 땅 위로 ‘쑤욱’ 올라온 행복의 줄기, 행복의 잎이 있습니다. 그걸 잡고 쭉 내려가면 됩니다. 그 잎이 뭐냐고요?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온갖 문제(경계)’입니다. 일상생활과 일상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깊이 내려가다 뿌리를 찾게 되면(고요해지면) 일상생활과 일상의 문제가 행복의 뿌리와 한 몸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견성입니다. 자기 자신과 일상생활을 깊게 들여다보며 내려가다 뿌리를 찾게 되면 모두가 하나이고 모두가 실상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일상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일까요? 
 

“현자는 모든것에서 배우는 사람
  강자는 자기자신을 이기는 사람
  부자는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


탐욕의 반대는 무욕 아닌 만족
세상사, 십분의 육만 내 뜻 맞아도
스스로 감사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그리고 이러한 행복까지 나눌때
당신은 일상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

첫째, 일상에서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대종사 인도품 29장에 밝혀주시기를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만족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천만년의 영화를 누리려는 사람같이 어리석나니,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만족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일상에서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복이 항상 무궁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깊이 들여다보면 원래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의 지혜와 덕상이 다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래 원만구족, 구공구족, 원래 부처, 원래 부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견성한 사람은 자신 스스로 존재에 만족하는 사람이지요. 

달라이라마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고 합니다.

교도님! 교도님들은 하루 수면에 만족하십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뜻에 다 만족하는 이는 어리석다고 하셨죠?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수면욕에 만족하고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하실 겁니다. 그리고 교도님들! 이생에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 아들 딸 며느리 남편! 이생에 아들 딸 남편에 만족합니까?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만족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재물욕, 애욕, 명예욕 등…. 하지만 이런 모든 욕심을 다 취하려다가 뜻대로 다 만족하기를 바라다가 신경 쇠약자도 되며 자살하는 사람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주변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인도품 29장에 이어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십 분이 다 뜻에 맞을지라도 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나누어 즐기므로, 그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복이 항상 무궁하나니라” 하셨습니다.

저는 한동안 풀지 못했던 화두가 있었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대할 때는 “대하는 학생들마다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을 도와줄까?”하는 어머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무엇을 도와드릴까?”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마음을 챙겨야 할까? 라는 것이 화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효녀가수 현숙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읽고 한 감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 기사에 ‘효녀 가수’ 하면 떠오르는 그녀. 그녀는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7년 간 치매를 앓던 아버지와 14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던 어머니의 수발을 들며 ‘효녀 가수’라는 칭호를 얻었죠. 어느 날 기자가 가수 현숙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7년간 치매를 앓던 아버지와 14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어떤 마음으로 수발 했나요? 이 질문에 현숙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는 딸로서 어머니 아버지를 모신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에 부모의 마음으로 모셨습니다.” 

이 기사를 접하고 그동안 풀지 못했던 화두가 풀렸습니다. 효녀 현숙가수의 인터뷰 기사내용에 “딸로서 부모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에 부모의 마음으로 모셨다”는 말에 이 화두가 풀렸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학생들을 대할 때는 그들을 도와줘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고 교직원은 성인이니까 내가 특별히 도와주지 않아도 될 대상이라 구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불성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이며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로운 관계이므로, 학생 혹은 성인 등으로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고 부처님 마음인 어머니의 마음으로 대할 때 내가 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할까? 무엇을 도와줄까?”라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겠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지요.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사람입니다. 

일상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영생의 행복자가 되길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경남교구장

[2019년 11월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