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교무들이 패션쇼를 했다. 오래도록 검정치마 흰저고리로 대표되어온 정복 아닌 정복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한복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양장을 겸용해서 의식 진행이나 일상 업무를 할 때 적절히 선택해서 활용하자는 의도이다. 

출가교역자 총단회가 열린 반백년기념관 들머리에서는 각 모델별로 실물크기 간판을 세워놓고 선호도 측정을 위한 인기투표도 행해졌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실행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 보인다. 이런 모습 속에는 매우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몇몇 사람이 책상에서 기획한 법규나 제도의 개선안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들의 바람을 동력으로 삼은 변화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규나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문화의 변화를 이끌기가 더 어렵다. 오랜 세월 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삶의 행태는 법규나 제도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종교도 그렇다. 종교가 사람들의 삶과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으면 종교의 생명력은 이어지지 못하고 만다.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거대 종교는 모두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했기에 종교적 성취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굳어진 문화는 종종 삶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문화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엔 새로운 문화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아쉽지만 문화의 외피가 썩기 시작하면 문화의 알맹이도 상하기 쉽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한 집안이 되어가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매우 급격하게 뒤섞이고 충돌하고 있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문화는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크게 열린 문화로 나아가는 개벽 세상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고질적인 신분제를 부정했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는 깨달음이 그 시대의 문화와 충돌했다. 예수는 안식일에도 병든 자들을 고쳤다. 유대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선언했다. 소태산은 진리를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 등상불 대신 일원상을 모셨다. 출가와 재가의 장벽을 허물고, 성과 속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일과 공부가 둘이 아닌 가르침을 폈다. 

바야흐로 새로운 문화가 꽃필 때이다. 소태산이 촉발한 문화는 아마도 모든 문화를 포용하는 극한의 포용 문화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검정치마 흰저고리를 버리지 말고 세상의 모든 치마와 바지와 옷들을 잘 활용하기 바란다. 여성 교역자들의 발랄하고 참신한 시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2019년 1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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