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조정중 원로교무 2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데 주의하라’했는데 온전함이란 어떤 것이며, 일상수행의 요법에 ‘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했는데 견성을 하지 못한 이는 어떻게 그 없는 자리를 표준 세울 것인가?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라’는 바로 ‘일원상 수행’ 또는 ‘삼학 병진 수행’을 실용적으로 번역한 말이다. 우리가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할 때 ‘공, 원, 정’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는 ‘진공묘유’ ‘공적영지’ ‘원만구족지공무사’등의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말의 형식은 다르지만 그 본질과 뜻은 본래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 용어를 사용하는 용처에 당해서는 완연하게 다름이 있다. ‘공’과 ‘진공묘유’는 정신수양을 공부할 때 더 적중한 의미가 드러나며, ‘원’과 ‘공적영지’는 사리연구를 공부할 때, ‘정’과 ‘원만구족 지공무사’는 작업취사를 공부할 때 더 적중한 의미가 들어난다.

오늘 공부는 ‘마음의 온전한 자리’와 ‘마음의 본래 없는 자리’를 어떻게 표준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는 당연히 ‘일원의 공한 자리’와 ‘진공묘유의 원리’가 체가 되고 표준이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는 분별성과 주착심이 공한 자리며, 이같이 공한 가운데 신령하고 오묘한 밝음이 발현돼 광명으로 충만함을 이루고 있다. 빈 가운데 가득차고 충만한 가운데 텅 빈 자리가 우리의 ‘온전한 마음’이며 ‘본래 없는 마음자리’이다.

이 자리를 함축하여 ‘일심’이라고 말한다. 일심은 분별과 주착이 없으며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는 마음의 본래 모습이다. 나아가 상(相)의 자취마저 비워버린 자리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를 당하여 취사를 할 때 먼저 일심을 챙기라는 것이며, 또한 일상생활의 삼학수행에서도 동정 간에 항상 ‘일심’을 근본으로 삼고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의두요목에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했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성이란 일체생령 스스로의 본래 마음을 말한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우주의 진리와 일체생령의 마음을 모두 ‘성품’이란 용어 하나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성이란 그만큼 넓은 전체적 의미와 좁은 개체적 의미를 총섭한다. 그러므로 자성을 통달하면 곧 우주를 형통한 것이요 자성을 깨치면 우주의 주인이 되며 천하를 관리하는 능력자가 된다.

어부가 천만 마리의 고기를 거둘 때 그물을 이용하며, 그 그물은 어부 손에서 결코 놓치는 일이 없는 벼리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인 벼리만 당기면 일만 코의 그물이 어부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원리다. 그와 같이 자성은 일만 가지 복과 혜의 원천이며 혜복을 거둬 들이는 벼리이다. 이 원리를 동정 간에 활용하는 공부를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라 한다.  

일원상은 상징적이며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자성은 그 일원상의 실제요 실체다. 따라서 일원상을 표준하는 공부는 사유를 통해 이뤄지지만 자성반조 공부는 사물을 거울로 보듯이 즉각 실체를 표준 하는 공부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는 처음에는 어려운 듯 생각하지만 좌선과 무시선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알고, 보고, 깨치면 이 공부처럼 쉬운 것이 없고, 간편한 것이 없고, 실질적인 것이 없다. 자성은 곧 진공묘유의 거울이며 공적영지의 거울이며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는 곧 일원상을 떠나지 않는 공부와 둘이 아니니 이를 믿고 정성을 들이면 가히 성불과 극락을 모두 성취한다는 말씀이다. 


성리품 28장에 “심,성,이,기(心性理氣)로 낱낱이 나누어도 보고, 합하여 보기도 하라” 했다. 쉽고 간명하게 이해하자면
사람은 정신과 육체의 조합물이다. 그 중 정신을 분석해 보면 생각하고 판단하는 ‘심’과, 생각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실존하는 ‘성’으로 이뤄졌다. 또한 육체를 분석해보면 생사고락의 생활을 이치에 의하여 행하는 ‘이’와 물질로 구성된 육체를 생동 순환케 하는 ‘기’로 구성돼 있다. 심, 성 ,이, 기는 서로 하나의 관계원리 속에 존립하는 유기적인 실체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 하나를 놓고 ‘심’ 하나로 합한다는 뜻은, 성은 심의 체(體)요 심은 성의 용(用)이다. 실제로 심이 작용할 때 성은 그림자처럼 내재한 실체일 뿐이다. 여기서 ‘심’이 작용할 때 ‘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을 ‘이’라 하며 또한 심은 근본적으로 기를 함장하고 있어서 육근을 작용할 때 육근이 심의 작용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기라 한다. 따라서 ‘심’을 중심으로 볼 때 심은 주가 되고 성, 이, 기는 종이 된다. ‘심’ 하나에 성, 이, 기가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치를 ‘일체유심조의 원리’라고 말한다.

사람 하나를 놓고 ‘성’ 하나로 합한다는 뜻은, 대종사님은 ‘선진포’ 강변에서 입정삼매에 들었다. 그 순간 대종사님은 분별하는 심이 없고 육근을 행동하는 기도 없으며 우주 순환의 ‘이’도 끊어진 언어도단의 공의 경지에 들었다. 이 경지가 심,이,기가 ‘성’ 하나로 합한 실상이다. ‘성’은 개체적 의미로 볼 때는 인성적인 성품이지만 전체적 의미로 볼 때는 우주의 성품이 된다. 왜냐하면 성은 도무지 하나이며 일원의 체성에 합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람 하나를 놓고 ‘이’ 하나로 합한다는 뜻은, ‘이’란 진리를 말하며 심, 성, 기가 모두 ‘이’의 이치에 의하여 영원불멸로 실존하는 동시에 서로 응하여 작용하는 중에 천지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모두 ‘이’의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보면 사람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이’의 이치에 소관된 것이요, 심, 성, 기가 ‘이’의 이치에 의하여 본래 하나인 일원상 진리의 기틀을 이룬 것이다. 

사람 하나를 놓고 ‘기’ 하나로 합한다는 뜻은, ‘기’는 일원의 위력을, 또는 힘을 상징하며 음양상승의 도에 의하여 원동력을 이룬다. 심을 양으로 보면 성은 음이요 기를 양으로 보면 이는 음이 되는 원리다. 천지만물은 음양상승의 ‘기 흐름’에 의하여 생은 사로 사는 생으로 변화하고 약은 강으로 강은 약으로 변화하며 모든 변화의 기초 원리가 된다. ‘심’의 생멸도 ‘이’를 바탕한 ‘기’의 작용으로 되며, ‘성’의 동정도 ‘이’를 바탕한 ‘기’의 작용으로 이뤄진다. 기는 땅에 물 스미듯 심, 성, 이에 깊이 함장돼 있다. ‘기’를 떠나서는 사람도 죽은 생명이요 바다도 죽은 생명이다. 하늘도 초목도 살아 있는 것은 한 물건도 없다. 도대체 만물의 동과 정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를 중심으로 보면 천지 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기’의 실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정산종사의 견성5단에 보면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고, 진공의 소식을 알고, 묘유의 진리를 보고, 보림 공부를 하고, 대기대용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씀했는데 견성의 완성은 성불을 말하는가? 그리고 대종사님은 법강항마위에 오르려면 견성을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했는데 그 수준의 견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견성은 분별과 망념을 완벽하게 쉬고 탁한 기운이 완연히 사라져서 도무지 움직임이 없는 맑고 고요한 체성에 들어야 한다. 또한 청정한 우주의 한 기운과 접기를 이룬 상태에서 가림 없는 신령한 영지(靈知)를 영접한 경지를 심안으로 관조하여 바르게 깨친 것을 말한다.

견성은 수행자의 근기를 따라서 너무나 큰 해석상의 차이가 있다. 견성에도 초입 견성에서 시작해 견성오도의 견성까지 현저한 차이를 이룬다. 정산종사가 말씀하신 견성5단은 단계적 수행의 표준을 분명하게 세워주신 것이므로 각항을 목표로 정진해 성불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5단계의 전체 대의를 세워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돈수의 근기에서는 견성이 곧 성불일수도 있으나 그는 매우 희유한 일이며 견성은 성불을 확실하게 또 빠르게 이루는 기초 단계로 봐야 한다.

대종사의 견성 법문은 수도인이 꾸준한 적공으로 성품을 보아 견성의 표준을 세우게 되는데 이 견성을 거울삼아 실제로 분별주착의 원인인 오욕진애를 항마해야 참된 견성의 문에 들 수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리품 19장에  백학명 스님과 대종사가 주고받은 시구를 해의하자면
불교는 열반을 통하여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고자 함이 교의의 전부이다. 백학명 스님은 속박의 세상을 벗어나서 피안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도를 닦고 있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대각의 경지에서 표현하기를 열반과 피안의 세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이 세상의 산과 바다가 장애로 가득한 속박의 세상도 아니다. 대각을 성취하면 그 진경이 홀로 드러나 절대 자리에 들며 피안과 차안이 둘이 아니다. 천지와 육체가 속박이 아니며 곧 불지요 천진무애임을 밝힌 것이다. 새 종교 교의가 그대로 반영된 시구라 할 수 있다.

[2019년 1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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