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타원 정연석 종사

[원불교신문=안세명] “소 교무야. 사람들이 내가 너를 닮고, 네가 나를 닮았단다.” 지난 9월29일 뉴저지교당 봉불식에 참석한 교도들은 20여 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명타원 정연석 원로교무(77)와 소예리 교무를 어머니와 딸로 부른다. 오늘도 티 없이 맑은 함박웃음으로 교당 찾는 이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정연석 원로교무. 일생을 다해 교화 일념으로 묵묵히 걸어 온 그의 걸음걸음을 후진들은 ‘길’이라 부른다.


미주교화 20여 성상
그는 56세, 늦은 나이에 미국 땅을 밟았다. “나는 영어가 참 힘들었어. 그래서 교무들 열심히 교화하라 응원하고, 나는 안에서 살핀 일 밖에 한 일이 없어. 신심, 공심, 공부심 그것 챙기느라 바빴지.”

신림교당 근무시절, 어느 날 갑자기 송영봉 원로교무와 이오은 교무가 찾아왔다. “자네가 미국에 가면 좋겠네”, “아이고, 선생님. 저 같이 영어도 모르는 문외한이 어떻게 미국을 갑니까. 그리고 그럴 힘이 제겐 없습니다.”, “아니네, 많은 분들이 자네를 추천했네. 자네가 꼭 가야하네. 3년만 살고 오소.” 그렇게 ‘딱 3년만 살고 오겠다’ 마음 먹고 소예리 교무와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3년 후 정산종사 탄생백주년 기념대회시 한국에 나와 좌산상사를 뵙고 “저 3년 살았으니 이제 나와야겠어요” 말씀 드리니, 좌산상사는 “거기서 죽지 뭐 하러 나오냐” 했다. 그렇게 뉴욕에서 13년, 뉴저지교당에서 9년, 20여 년을 미국에서 살게 됐다. 뉴욕교당에는 다행히 김덕전·박진은·김수현 교무가 있어 교화하기 수월했고, 이병철 교도와 김묘정 교도와 같은 호법동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돌이켜 보면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다. 교무들과 재가 도반들의  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음 속 영원한 스승님
“내 마음 속에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와 역대 스승들을 다 모시고 살았지만 정진숙 교무와 이성신 교무는 부족한 나를 이끌어 준 실지 스승이셨다.”

그는 정진숙 교무를 전주교당과 대신교당에서 모시고 살았다. 대신교당에서 살다가 50만원 전셋집으로 분가해 대연교당으로 가라 명했을 때 스승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훗날 자력을 키워주려는 스승의 큰 은혜였음을 알게 됐다. 그렇게 대연교당에서 10년을 살았다. 

“정진숙 교무는 참 품이 넓고 후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했다. 후덕하시고 소탈한 인품에 교도들이 참 좋아했다. 나는 그분을 어머니로 알고 딸 같이 살았다.” 그는 지금도 마음의 폭이 작아질 때면 스승을 생각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뵙고 싶은 분이다.

이성신 교무는 그에게 출가의 인연을 갖게 했다. “광주교당 3년의 간사시절, 나는 그때 참 철이 없었다. 참 예쁘신 여성교무가 설법을 하는데 내 마음이 시원해지고 환해졌다.” 양재학원을 다니며 사회 취업준비를 하던 그는 교당에서 하숙을 했다. 이성신 교무를 보니 사회생활이 부질없는 것 같았고 교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교전을 보는데 한없이 눈물이 났다. “스승님, 저도 교무가 되고 싶어요”, “너는 안 예뻐서 안 돼.”, “교전을 보니 이생엔 비록 예쁘지 않아도 마음공부를 잘하면 내생에 예뻐진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너, 교무 한번 해 볼테냐?” 그렇게 허락을 받고 하숙생에서 간사로 주소를 바꿨다. 

3년간의 간사생활은 몸은 고되었으나 매일매일 기쁘고 행복했다. 새벽엔 광주교당 14계단을 올라 종을 울렸다. 광주매일신문에 ‘종치는 누나’로 소개될 정도였다. 밥하고 일하고 농사짓고 똥을 퍼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보람찼다. 큰 교당이라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고 도무지 쉴틈이 없었다. 어른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다. 한번은 영가 이름이 ‘김돼지’여서 천도재 중간 웃음이 터져 도중에 쫓겨나기도 했다. “이성신 교무는 교화에 능이 나신 어른이셨다. 정성스럽고 설법도 참 깊고 막힘이 없는 분이다. 늘 홀로 방에 앉아계시며 설교를 깊이 연마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정진숙, 이성신 두 스승의 자비와 수행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이 고단한 미국 교화를 위해 헌신하는 젊은 후진들이 마음껏 교화할 수 있도록 오늘도 그는 스승의 심법을 대물림한다.

20여 년 함께 동행의 길을 걸어온 뉴저지교당 소예리 교무(좌)와 정연석 종사(우)


개척의 염원을 담아
그가 미주동부교구장으로 재직시 마이애미·휴스턴·노스캐롤라이나·보스턴·뉴저지·리치먼드, 뉴욕원광복지관 등 7개 교당과 기관을 설립했다. 한 교당, 한 기관을 낼 때마다 그곳엔 사연도 많았고 눈물도 깊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다. 교구장으로서 지혜와 역량이 부족한데 교무들의 헌신과 교도들의 열정으로 거룩한 불사를 이뤘다”며 험난한 개척의 역사를 마다하지 않고 현지인교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후배 교무들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머물고 있는 뉴저지교당 또한 100년 된 집을 고치고 살면서 종교활동 허가를 받기까지 꼬박 7년의 세월이 걸렸다. 숱한 주민공청회와 까다로운 법적조건을 완비하기까지 매순간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5월, 교당 간판이 반듯하게 세워졌을 때 대종사의 교법의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음을 체험했다.
 

일상수행, 일심으로 헌거롭게
“요즘 나는 참 헌거롭다. 일 있으면 소 교무와 같이 합력하여 교화하고, 소 교무가 주민을 만나고 교화하러 나가면 청소 하고 식사 준비도 하고.” 아침 좌선과 저녁 기도, 경전 사경은 그의 일상이자 수행이다. 전무출신 본연의 자세를 지키는 것만 해도 교당은 ‘영성소(靈性巢)’가 된다. 그래서 그는 대산종사의 ‘아침은 수양정진, 낮에는 보은노력, 저녁엔 참회반성’을 공부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는 <대종경> 성리품 18장 염소 기르는 법문이 젊어서부터 가슴에 새겨졌다. “한 사람이 염소를 먹이는데 무엇을 일시에 많이 먹여서 한꺼번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절차와 먹이는 정도만 고르게 하면 자연히 큰 염소가 되어서 새끼도 낳고 젖도 나와 사람에게 이익을 주나니, 도가에서 도를 깨치게 하는 것도 이와 같나니라.” 그렇게 그는 뚜벅뚜벅, 오래오래, 한결같이 이 법만 오롯이 지키고 살면 교화가 될 것이라 자신한다.
 

세계교화를 위한 기도와 원력 
그는 미국교화에 언어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심지가 확고한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지극한 신심과 서원은 영원한 법종자이자, 대종사의 세계사업 법륜을 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교화의 터전은 미국이다. 이 미국 땅에서 교화가 무르익어야 한다. 51개주 전역에 일원대도 전법종자가 뿌리내리길 기도한다. 우리 후진들의 서원이 투철하고 신심이 굳어지길 매일 염원한다.” 오늘도 기도하는 그의 손끝엔 스승의 성혼이 맺혀간다.
 

[2019년 11월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