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출신 정신 이어가되
그 본의 흐리지 않아야

[원불교신문=박중훈 교무] 대종사 당대에는 교단의 제도와 교도들의 교당생활 등이 그 시대를 향도했다. 사회와 문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기에만도 벅찬 발걸음을 우리는 하고 있다. 금년 중앙교의회의 화두는 단연 정년연장과 전무출신 용금의 단일화 문제였다. 이 두 가지 화두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용금 제도에 대해 그 본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전무출신은 처우(處遇)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사가에 구속이 없이 그 임무를 전일이행(全一 履行) 자’로 전무출신을 규정했으며, 다만 1기를 7년 기한으로 해 집무 기한에 따라 교단에서 예우를 달리했을 뿐이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원기33년 제정된 교헌 제16장에 전무출신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데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본교에 공헌한 자를 전무출신 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종별(種別)을 나누면서 ‘1종은 의식비용을 자담(自擔)한 자와 의식비용은 교중에서 수용하나 달리 급료지불을 받지 않는 자로 한다. 2종은 생활형편에 의하여 부득이 지정 요금을 받는 자로 한다’고 했다.

이 규정에 담긴 의미는 이후 지금의 용금 제도에 대한 근간이 됐다. 그리고 이후 53년에 제정된 전무출신규정에서 ‘제2조 전무출신의 의식용금은 교중에서 수용하나 달리 급료 지불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 후 원기 77년이 되어서야 전무출신규정에 ‘처우’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급여’ 또는 ‘급료’라는 용어들이 쓰이게 됐다.

규정을 통해 보았듯이 전무출신이 처우(조처하여 대우함)라는 말을 스스로 꺼내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본교에 공헌한 자’라는 전무출신의 정의를 들이대면 여지없이 할 말을 잃어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으며, 고령화 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개인의 처지는 물론 부모형제를 보살펴야 하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전무출신 지원자는 감소하고 있으며 이 원인의 일부는 용금 제도에 있음을 지적하는 의견들도 있다.

현 교단의 전무출신 대부분은 제정 교헌의 전무출신 3기에 해당하는 ‘집무기간을 정하지 아니하고 일생을 오로지 헌신한 자로 한다’ 는 제도 하에서 양성됐다. 이 제도는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전무출신을 서원해 봉직할 수 있는 다양성을 없애고 오직 일생을 이 길만 선택하도록 규정했다. 어쩌면 예견된 상황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 규정은 필연적으로 전무출신의 처우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남녀 전무출신들이 출가 서원 이전(대졸자 기준 만35세 이하만 지원 가능)에 사가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경제력을 갖추어 놓기 어렵다는 것이며, 출가 후에는 모두가 일반 직장이 아닌 교단 내의 일터에서 용금과 생활지원금만(원기103년 기준 최고 126만원) 받는 자로서 근무를 해왔기 때문이다. 교단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재가 출가가 함께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몇 가지 의견을 내본다.

먼저 처우의 기준치이다. 전무출신 정신을 면면이 이어가되 그 본의를 흐리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 기준치가 국가로부터 오히려 근로장려금을 받아야 하는 지원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전무출신 봉직기간의 다양화이다. 일생 종신제 전무출신이 대다수인 현 구조를 기간제 전무출신이 많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도를 유연하게 보완해 유능한 인재들이 교단과 세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을 다양하게 열어주되 후생을 책임지는 교단의 부담은 덜어내자는 것이다.

/정읍교당

[2019년 1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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