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말며.” 특신급 십계문 2조의 내용이다. 즉, 다른 사람의 흉을 보거나 험담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각산 신도형 종사는 그의 저서 <교전공부>에서 남의 과실을 말하면 구습(口習)이 나빠져서 인격이 손상되고, 쟁투의 원인이 되어 원수를 맺게 되며, 남의 미움을 살 뿐만 아니라 성불의 길이 멀어지고 제중의 본원에 어긋나게 된다고 했다. 또한 진리적으로 상극의 인연이 많을 것이며, 구설(口舌)이 많을 것이라 경고한다. 진리를 제대로 몰라서 타인과(他人過)를 하는 것이기에, ‘타인과를 하는 자는 스승의 자격이 없다’라고 까지 강조해 말하고 있다. 

다만, 지도상 부득이한 경우의 타인과는 범계로 보지 않고 예외로 두었다. 본인에게 직접 충고하거나 그 사람의 단점을 진정으로 고쳐주기 위해서 또는 대중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해서 그 사람을 직접 지도하는 분에게만 조용히 말씀드리는 것은 범계가 아니요 동지간의 신의며 공심이라 밝혔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이 상사나 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에 대한 험담을 마치 식후 디저트처럼 가십거리로 즐기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종교가에서도 시비이해는 있게 마련이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교단에서 교도 간 혹은 교도와 교무 간 혹은 교무들끼리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받는지 반조해 보자.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이 사람을 살리는 상생의 말인가,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상극의 말인가. 진정한 충고와 권장이 담긴 상생의 말이라면 우리 교단의 미래는 밝을 것이요, 서로 헐뜯는 상극의 말이라면 교화 침체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종교가는 좀 다르지 않을까’해서 교당 문을 두드린 그 누군가가 ‘여기도 사회랑 별반 다른 게 없구나’라는 실망을 안고 돌아서는 일이 없길 바란다. 

교전에 명확히 밝혀 주셨지만 현실 경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잊는다. 인과의 진리는 호리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내가 짓지 않은 것은 절대로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행여나 주변에 마음에 들지 않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인연이 있다면, 그를 험담하기 전에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내 마음에 씨앗이 없다면 그 사람은 나의 우주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내 마음속 씨앗의 현현(顯現)일 뿐이다. 즉,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난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내 마음을 깨치게 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자. 

엄연히 계문에 있는 사항이다. 다 함께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가자. 상호 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성숙한 교단의 풍토가 조성되길 기도한다.

[2019년 1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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