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명 교무

[원불교신문=윤관명 교무] “악의 뿌리는 무사유(無思惟)” 이것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촛불시위’ 이후로 가장 주목받은 서구 정치 이론가다. 그는 서구의 전통적 정치 개념에 근본적인 반성을 제기하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다. 

1961년 4월11일,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 나치 독일의 전범자 재판이 열렸다. 홀로코스트(Holocaust·유대인 대학살)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하는 일을 맡은 최고 책임자였다. 그런 악행을 저지른 인물은 분명 극악한 ‘정신이상자’라고 예상했지만,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친절하고 성실했으며,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었다. 그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판사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누구 한 사람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가스실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뉴요크’ 기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참관하고 이렇게 평했다. “아이히만이 자신의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이유는 사유하지 않음에 있다.”

법적으로만 본다면 아이히만의 행동은 합법적이다. 오히려 그의 관점에서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근무 태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정당한 일인지 부당한 일이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자기 검토란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이다. 때문에 생각 없이 명령에 순응하고 결과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관하는 보통의 사람이 큰 악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죄가 되었고 마침내 교수형에 쳐해졌다. 개인의 사유를 멈추게 하는 조직이 있다. 전체주의나 독재 치하처럼 제도적으로 억압적 권력이 작용하거나, 군대처럼 엄격한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곳에서 개인이 조직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조직의 총체적 지배는 인간의 자발성을 파괴한다. 또한 중간 단계의 권위와 권한이 상실되면 더는 창의성과 책임감을 요구할 수 없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상부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비효율적 조직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 더는 비밀경찰도 없고 강제수용소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잉여적 존재로 만드는 조직문화가 있다. 이러한 조직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우리가 반복되는 조직의 관습에 익숙해지고, 상투적 용어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바로 ‘무사유’의 징후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내가 속한 집단과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해야 한다.  공익을 위해 정의에 동참하는 자주력을 갖춰야한다.

/동창원교당

[2019년 1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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