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떻게 살았느냐가 결정
교화도 될 때까지 하는 것

이성하 교무

[원불교신문=이성하 교무] 교당의 토요 선방에는 꽤 오랫동안 나오는 사람도 있고, 한 번씩 스쳐 가는 사람도 있다. 그 중 D씨는 1년 넘게 매주 토요일마다 꼬박꼬박 선방에 나온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그녀에게는 19년을 함께 살아온 반려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 ‘쉐도우’는 자그만치 19살로 그녀가 도움을 주던 민원인에게 어쩌다 입양을 한, 메인쿤종으로 보이는 잘생긴 장모 고양이였다. 사람으로 따지면 백 살이 넘은 고양이라 올해 쉐도우는 어느 해보다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기침이 멈추지 않고 재채기를 할때마다 피가 나온다고 했다. 의사 말로 암이 온 몸으로 퍼졌다 했는데 9월말부터 아예 음식을 끊고 숨쉬기조차 힘들어한다고. 그런 쉐도우를 더는  볼 수가 없어서 10월 중순쯤에 D씨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존심이 세고 씩씩했던 쉐도우에게는 고통 속에 하루 하루를 버텨가는 마지막은 어울리지 않으며, 더이상 쉐도우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해 안락사를 하기로 했다. 말기 환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는 사회복지사로서 많은 노년의 죽음과 말기 환자들의 고통을 봐왔고, 존엄사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된 그녀의 신념은 아마 쉐도우의 마지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동물이라면 스스로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알뿐 아니라, 죽음을 맞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혼자서 죽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콜로라도교당에 근무하던 시절, 교당 가까운 곳에 주립 공원이 있었다. 그 공원에는 사슴이 정말 많아서 공원을 갈 때마다 사슴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어느 날은 너무 가까이서 사슴과 대면하는 바람에 황소만한 사슴 앞에 얼어붙은 적도 있었다. 가끔 궁금했던 것은 사슴이 그렇게 많은데 공원 어디서도 사슴의 시체를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그 많은 사슴들은 대체 어디서 죽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콜로라도의 사슴 같은, 나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고요한 죽음을 맞지는 못하지만, 쉐도우는 나름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인간의 마지막보다도 오히려 더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했고, 교당으로 이어져 천도재까지 지내고 있다. 올해 교당에서는 지내는 두 번째 고양이 천도재다. 쉐도우의 경우 영어로 식을 진행해야 해서 재를 모시기 전에 꼼꼼하게 축원문, 성가, 법문 등을 재차 읽어보고 불러보고 확인하며 재식 준비를 한다. 

미국이라는 너른 천지에 원불교의 문을 열었지만, 아직 여기에 원불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세상이 더 넓다. 이 좋은 천도 법문으로 사람이 먼저 제도 받으면 좋겠으나, 어느 복 많은 고양이들의 차지가 먼저 되기도 한다. 제도의 문이 넓고 넓으며, 중생의 수가 가이 없으니 누군들, 무엇인들 이 제도문에 들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싶다. 

올해 내가 이 넓고 넓은 땅, 많고 많은 육도 사생 중 누구를 제도문으로 인도했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받는 것이 주는 것이라’ 라는 법문 말씀을 떠올리며, 이 커뮤니티에, 이 세상에 내가 무엇을 줬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며 교화의 셈법을 점검하곤 한다. 

때로 교화가 막막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시선을 멀리 던지며 오늘 몫의 하루를 잘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오늘 몫의 교중사를 소홀히 하면서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의 나의 삶이나 교단의 모습에 다복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찮은 삶은 네가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결정짓는 것이다. 하찮은 교화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이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뤘느냐가 아닐까. 

기우제를 지내듯, 교화는 될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계속 꾸준히 매일 한다. 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교당

[2019년 1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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