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 김도천 북일교당 교무

‘음양상승의 도’가 어떤 원리인지에 대해 해의해 달라
우주자연 파장의 질서를 이루는 음양(陰陽)의 두 기운, 서로 상승(相勝)하는 우주 기운의 순환현상으로서 음양상승을 다른 말로 음양상추(陰陽相推)라고도 한다. 음양상승이란 음 가운데 양이 포함돼 있고, 양 가운데 다시 음이 포함돼 있어 서로 밀고 당기며 그러한 과정에서 우주 대자연의 질서가 무량세계로 전개되고 나타남을 말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이치가 담겨져 있고 이러한 내용을 인과보응으로 연결 지을 수 있다.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다고 했다. 현실생활에서 이러한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사용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신앙·수행의 자세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과 불행이 나타나는 이치를 따져봤을 때 항상 좋기만 한 경계가 지속될 수 없고, 항상 나쁘기만 한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나에게 역경(음의 기운)이 다가올 때 ‘내가 어려운 경계구나’를 인식하면서, 그 어려운 경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음이 양이 될 수도 있고 양이 음이 될 수도 있는 마음의 힘과 원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힘은 단시일 내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선업을 짓고 경계를 잘 극복해 나가는 힘을 가져야 한다.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서 순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그 경계가 변화돼 역경이 되기도 하며, 때론 공경의 순간이 오기도 한다. 이러한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 죄복을 자유롭게 하려면 대종사의 가르침을 교법대로 실천하고, 스승과 동지에게 묻고 받드는 공들임을 지성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서원을 세웠다 하더라도 목적반조대로 될 수 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 자성반조와 더불어 오늘도 참회하며 내려놓고, 내일도 회광반조로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밖으로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내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하는 등 안팎으로 정성을 들여야 편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공부인은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고 죄와 복을 자유할 수 있도록 역경의 경계에서도 신심과 서원으로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서원을 반조하고 스승의 가르침, 법문에 의지해 맥을 대고 극복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으로 공부해야 한다.
 

순역경계 속에서 상생상극 업력 벗어나 
죄복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

모든 경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온다.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직면하는지가 
내 삶의 결과를 바꿔놓는다

상극의 업력을 벗어난다 하지 않고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난다한 이유는
악업을 짓지 말라는 이유도 있지만, 선업이든 악업이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 해탈의 심경이지 않겠는가. 악업으로 인한 죄업의 고통에도 벗어나야 하지만 선업이라는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선업을 짓는 가운데 나타나는 상생의 인연이나 그 가운데 얻게 되는 명예, 또는 선업을 베풀었다는 상 등 이러한 결과로 인한 선업, 즉 상생의 업력이 음양상승의 변화되는 이치로 다시 상극의 업력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상생의 업을 지었다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마음으로 인해 악업을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응용무념이 중요하고, 주함이 없는 보시가 매우 중요하다. 평상시 이러한 공부로서 우리 수도인들은 도력을 얻어 업력을 대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마땅히 수도인의 자세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공함의 이치를 요달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상없고 사사로움이 없는 선업을 계속 수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공부인은 상극의 업력을 도력으로 대치하도록 해야 하고, 또한 상생의 업력에 끌리지 않고 벗어나는 참회 공부를 해야 한다. 곧 사참과 이참으로써 죄성이 본래 공한 이치를 깨달음과 동시에 지었던 과보에 대한 참회가 함께 필요하다.


<정산종사법어> 32장에 이참의 방법 중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것임을 요달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공부는 어떤 공부이며, 어떻게 이참의 방법이 되는가
일체란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일체라 하기도 하고, 안이비설신의 육근동작으로 짓는 모든 업 또한 일체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육근동작으로 짓게 되는 모든 행동을 일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일체가 다 내 마음이 짓는 바이니까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어떤 발원을 갖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이참이란 죄성이 공한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라 했다.

성품자리에서 본다면 무선무악(無善無惡)이며 번뇌망상의 실상이 공함을 알게 된다. 진여의 성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능히 선한 면도 있고 능히 악한 면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탐·진·치의 분별식심으로 보지 않고 성품을 여의지 않는 세상에서는 나타나는 실상의 체성을 보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사은이며 은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얼마 전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이란 책을 읽었는데, 스스로 1년 동안 감사일기를 쓰면서 변화돼 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스스로 행복해졌던 자신의 삶을 감사하고 감사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생활모습을 소개해 감사일기가 가져다 주는 행복을 소개한 책이다. 어쩌면 대종사의 교법을 이렇게도 잘 실천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일기는 만유의 실상을 그대로 분별없이 보게 되는 또 하나의 공부이며 참회의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감사생활을 통해 진리의 실상이 은혜임을 찾아가고, 그로 인해 해탈의 공부가 되며, 곧 참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공부는 원리가 하나로 이어진다.

모든 경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온다.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경계를 대하고 직면하는지, 오는 경계에 어떻게 어떠한 마음으로 대처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내 삶의 결과가 달라진다.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임을 요달하라’ 하신 뜻을 연마해보기 위한 좋은 예의 하나이다. 경계에 직면한 내 마음이 감사생활이 될 때 해탈과 참회와 낙원이 다 그 속에 들어있다. 실제로 감사한 마음을 나는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한줄이라도 감사한 내용을 꾸준히 기록해나가는 사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신앙 수행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2019년 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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