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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대종사님 만났으니 흉내라도 내야”
[신앙인] “대종사님 만났으니 흉내라도 내야”
  • 김세진 기자
  • 승인 2019.12.10
  • 호수 19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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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오 충북교구 충주교당 교도

인생의 1순위는 항상 교당
거주지를 옮겨도 주인정신으로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대종사님 법 만남에 감사해

[원불교신문=김세진 기자] ‘교당에 오니깐 이곳이 정말로 사람 사는 곳이구나. 이런 세상이 있다니.’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한 소년은 스승님들과 도반들의 따뜻한 정으로 교당에 다니게 된다.
그로부터 그는 55년 동안 전라도, 경상도, 서울, 충청도에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도 한 번도 교당을 등한시한 적이 없다. 그 주인공인 방산 이정오(77·方山 李正悟) 충주교당 교도를 만났다.
“긴 세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교당이 항상 1번이었어요.” 전주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인연으로 원기49년 전주교당에 다니게 된 이정오 교도. 그의 인생의 1순위는 교당이었다.

전주교당에서 50여 명 넘게 학생법회를 보던 시절 그는 교동교당을 키워주자는 연화촌 선배들의 권유로 선뜻 교당을 옮겨 교화를 활성화하는 데 일조했다. “성심여고 학생들이 유독 잘 따랐어요.” 후배들과 친하게 잘 지낸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의 따뜻한 미소가 좋은 기운을 전한다.

이후 전주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그는 결혼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의류회사에 입사해 익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후 곧바로 대구로 발령을 받게 됐다. “대구로 이동해서는 서성로교당에 다녔어요. 그런데 승진해서 다시 익산으로 오게 됐죠. 그때는 영등교당에 잠시 다녔어요.”

익산과 대구를 오간 그는 다시 승진해 대구로 이동하게 됐다. “세 자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을 거예요. 성적도 떨어지게 됐어요.” 그에게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난다.
“대구에 가서도 서울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는 저만 서울에서 지냈지요. 주말에는 대구에 돌아와 월요일엔 새벽 4시30분 첫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다녔어요.”

그러던 중 그는 회사의 비전이 보이질 않아 40대 중반 회사를 그만두고 대구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풀렸지만 얼마 못 가서 거래처 부도로 시련을 겪게 됐고 상황은 더욱 나빠져 집까지 경매가 되고 파산을 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교당엔 꼭 다녔어요. 자녀들도 잘 버텨줬고요. 그러던 중 아버지의 천도재를 교당에서 지냈어요. 천도재를 통해 해원하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 갑자기 교사자격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천도재를 지내고 정확히 1년 후 밀양 밀성초등학교 기간제교사에 초빙 됐다. 천신만고 끝에 수업을 시작하려던 그는 교실에 컴퓨터가 놓여있는 것이 문제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갑자기 오게 돼서 컴퓨터를 못 한다. 누가 나를 가르쳐 주겠니?” 그의 진심이 통했을까 몇몇 아이들이 가르쳐 줘서 위기를 극복했다. 나아가 마음공부 일기를 통해 아이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그 이후 나이 많은 교사도 정규직 교사를 뽑는다는 공모를 보고 응시하게 된 그는 정년을 5년 남겨두고 충청북도 목행초등학교 정교사로 오게 됐다. 2002년 3월1일자로 발령받은 그는 이곳에서도 아이들에게 일기를 기재하도록 지도하고 감정했다.

전주교당 청년회장과 서성로교당에서 부회장으로 주인 역할을 했던 그는 충주교당에서도 주인 역할로 교도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교당에서 사회를 보고 성가 반주까지 도맡아 한 그는 부회장과 교도회장직을 역임하게 된다. “타지에서 왔지만 주인 노릇을 해서 자연스럽게 충주교당의 일원이 됐어요.”

충주교당에 다니면서 최성양 교무의 인도로 원기87년부터 지금까지 일원상서원문을 매일 사경하고 있다는 그는 ▷정보전산실에서 시행하는 ‘대각개교절 편지쓰기’ 행사에 2년간 우수상 ▷문화사회부에서 주관한 ‘원불교 용어 찾기’ 행사에 1등 수상 ▷교화연구소에서 주관한 ‘제3회 속 깊은 마음공부’ 행사에 의두 부분 감동상 수상 ▷교정원에서 주관한 ‘법문 사경 체험수기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 사단법인 대한문학세계 수필 부문과 시 부문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원불교 홈페이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어요.” 공지를 보고 스스로 응모해 많은 상을 받은 그는 온라인 교화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전으로 가르쳤지요.” 그의 신앙생활 덕분인지 막내(이주연 교무·원광대학교 사상연구원)가 출가해 전무출신이 됐다. 부모님 열반 후 가정의례를 예전대로 시행하고 있다는 그는 원광대병원에 시신 기증 서약을 했다.

“긴 세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대종사님 뒷배 삼아 잘 살아왔음에 감사해요.” 그의 목소리에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드러내지 않고 함축하는 공부를 표준 잡고 살아온 그는 “교당에서 후진들이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충주교당에 백현린 교무님이 부임해 새바람이 불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말한다.

“대종사님 법 만났으면 완벽히 다 할 수 없어도 흉내라도 내봤으면 해요.” 그의 간절한 염원이다.

[2019년 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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