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소태산 대종사께서 가르쳐주신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은 각자의 근기와 경우에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공부입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으로 공부하고 일일이 문답하고 지도인에게 감정과 해오를 얻으며, 내 삶을 산 경전과 큰 경전으로 삼는 공부이기에 대종사께서는 우리의 공부는 맞춤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공부인: 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명상을 합니다. 명상 후 고요한 느낌이 참 좋아요. 하지만 가족을 만나면 한순간에 마음이 시끄러워집니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고요. 

▶지도인: 한 제자가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화나는 일이 많아서 고민하다가 스승에게 “스승님은 한 달에 몇 번 요란해지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승이 “3번”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요란해지면 열흘은 가”라고 덧붙였습니다. 요란해지면 안 된다는 한 생각이 모든 만남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심결>에 왕이 존자에게 성품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존자는 “작용하는 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불조요경> 수심결 5장). 일원상의 진리는 일체 중생의 본성 즉 마음 작용의 원리를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만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이 마음 작용의 원리입니다.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만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한다면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경계를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이를 염려하시며 “성품의 자체가 한갓 공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만일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을진대 이것은 성품을 단련하는 선공부가 아니요 무용한 병신을 만드는 일이니라. 그러므로, 시끄러운 데 처해도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하고 욕심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여야 이것이 참 선이요 참 정”이라고 하셨습니다(<정전> 무시선법). 가족과 의견이 달라서 화가 날 때, 상사와 동료·후배와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을 겪을 때가 바로 일어나는 마음 작용으로 공부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공부인: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고 집착해서 요란하고 어리석고 글러지는 마음 작용을 부정했군요.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경계에서도 도망치려고 하고.

▶지도인: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산 경전, 큰 경전이라고 하셨습니다(<대종경> 수행품 23장). “경전이라 함은 일과 이치의 두 가지를 밝혀 놓은 것”이니 “우리 인생은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서 일과 이치 가운데에 살다가 일과 이치 가운데에 죽고 다시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는 것이므로 일과 이치는 인생이 여의지 못할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며 세상은 일과 이치를 그대로 펴 놓은 경전”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삶이 일원상의 진리인 줄 모르고 삶을 문제로 보고 풀려고 하니 더 꼬이고, 삶을 안정시키려고 하니 더 불안정합니다. <정전>에 밝혀주신 용심법 진리관인 일원상의 진리로 마음 작용과 삶을 바라보고 응용하면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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