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타원 남궁선봉 종사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 교화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심타원 남궁선봉 원로교무(81·心陀圓 南宮善鳳). 당시에도 생소했을 남미 지역에서 오늘날 기반을 마련하기까지 모든 것을 진리전에 맡겨버리고 살아왔던 그였다. 하지만 기쁨과 보람이 컸던 만큼 다시 한번 그때를 생각해보면 결코 녹록치 않았던 교화 터였다. “교화를 45년간 했지만 남미교화에 나서기 전에는 한번도 교화가 어렵거나 괴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선교소
원기87년 국내 현장교화로는 군산교당을 끝으로 그가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던 그 시점까지 그에게는 수많은 고민이 있었다. 원기82년 좌산종법사의 유시로 아르헨티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되면서 군산교당에서 알마타에 근무하다가 잠시 쉬러왔던 장호준 교무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고 국내에서 뒷바라지 해왔었다. 장 교무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집을 마련할 때까지 조력하려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3개월간 그에게는 큰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준 교무와 3개월 있으면서 결정내리기를, 남은 여생을 남미에 정성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만큼 당시 그곳 상황이 사람을 만나고 교화가 발전할 기미가 안보인 곳이었지. 이런 상황을 보고 한국에서 여생을 보낸다면 교화자로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다음생에 대종사님을 도저히 못뵐 것 같았어.”

원기71년 2월 김용정, 김순정 가족과 박영달, 송유경 가족이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것에서 아르헨티나 개척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장 교무 혼자서 교화를 살려나간다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가 정상적인 몸도 아니었다. 뇌졸중을 앓아 시술까지 받았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라리 그곳에서 순직하겠다”며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죽기를 작정하고 들어가니 그는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국내에서 이곳에 다녀간 사람들이 “여기는 못 올 곳이네”라는 소리를 들었어도 그에게는 한번도 지루하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수교당 교무시절 추천했던 유영수 교무가 걱정되는 마음에 “남미교화를 마칠때까지 모시겠다”며 그를 찾아오면서 교화의 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만불짜리 천도재를 지낼 일도 생겨 교당 리모델링 공사에 보태기도 하고, 중국계 조선족들을 포함해 20여 명 법회를 보는 상황까지 전개됐다.


칠레교화의 시작
“원기91년 6월25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교당 봉불식 날짜를 잡고 항상 기도를 했어. 그런데 어디선가 ‘칠레를 가야한다’는 소리가 들리는거야. 그렇지 않아도 좌산종법사께서 전에도 ‘칠레도 생각해봐’라고 그러셨어. 그때 속으로 내 속마음도 모르신다고 서운해했거든.”

그가 아침마다 공원을 산책했는데 나가면 늘 만나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 “칠레에 가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고 고민을 털어놨더니 칠레에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 줬다. 그는 유영수 교무와 함께 그 집주소를 들고 찾아갔다.

“9월이라 검정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갔더니 빤히 쳐다봐. 정말 딱하게 보였나봐. 나는 원불교 교역자인데 혹시 여기에 원불교 교도라든가 원불교 아는 사람 찾으러 왔다고 그랬어. 그 사람이 기가 찼는지 어떻게 찾을라냐고 묻더라고.”

순간 지혜가 솟았다. “신문에 광고를 내고 싶다”고 하자 우연하게도 그가 신문사 편집장이 자기 친구라며 소개시켜줬다. 그 사람 집주소로 광고를 내고 그 지역에서 제일 싼 호텔에 3일을 머물렀는데 따로 갈 곳도 없어 다음날 그 사람 가게를 또 찾았다.

“그 사람도 고민했던가봐. 내가 계속 찾아 오니까. 그래서 세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대. 그래서 삼일간 세사람을 돌아가며 만났고 식사를 얻어 먹었지.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맙더라고. 그래서 마지막날 내가 그 분에게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했어.” 

결국 남궁 교무가 감사한 마음을 담은 사례비로 그는 점심 식재료를 장만해 집으로 초청했다. 집을 방문한 남궁 교무는 거실 벽에 걸려있는 그의 어머니 사진과 그 앞에 놓인 목탁을 발견했다.

“그 사람이 팔남매 가운데 막내야. 어머니가 절에 가서 기도해 낳은 아들이었어. 그 어머니 생각에 목탁은 못쳐도 그 앞에 놓고 있었던 거야. 18년간 칠레와서 아무리 외롭고 그랬어도 교회도 안나갔어. 내가 이 어머니를 위해서 천도 기도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

점심식사를 마치고 남궁 교무는 그에게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설명기도를 올렸는데 신들린 것처럼 말문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유영수 교무가 마침 가지고 온 독경집을 그에게 주면서 기도와 독경을 마치고 나니 크게 감화를 받아 여섯가족이 입교했다. 그가 바로 이제원 교도 내외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으면서 유 교무와 함께 원기90년 9월~ 원기91년 10월까지 5차례 걸쳐 칠레를 방문한다. 이제원 교도 내외를 포함해 만난 세 가족도 입교를 하며 산티아고 교당 교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여기서 <정산종사법어>, <원불교예전>, <교사> 등 원불교교서를 스페인어 번역에 매진했던 고(故) 알렉스 곤잘레스(Alex Gonzalez·법명 원문도훈) 교도를 만난다.

“그동안 남미지역 교당에는 특지가나 연원교당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칠레에 화곡교당 진산 유현진 교도, 여타원 이윤성 교도가 힘써주고 계시고, 아르헨티나 교화에는 죽전교당 현타원 라현정 교도가 애써주셨다. 서울교구 보은회(김재성 회장)도 꾸준히 관심갖고 도와주고 계셔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나의 자리도 모르고 사냐
그의 공부 표준은 간명했다. “나는 대공심·대공심(大空心·大公心)을 표준 잡았다. 학생시절부터 대산종사를 가까이 모시고 살았어. 교역생활하면서도 대산종법사께 검증받지 않고 한 일이 없었어.” 그가 이러한 표준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스승들을 두루 모신 결과 속 깊이 깨친 일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도형 법사께서는 ‘사사도 공의로 하면 공사가 된다’는 말씀에 집안일을 돕는데 언제나 대산종법사께 사뢰면서 했다. 박은국 종사께서 배내골을 가꾸시느라 고생하실 때 내가 걱정되는 마음에서 ‘애써서 가꿔놓으신 것을 어떤 후진이 이어받을지 걱정됩니다’고 했더니 ‘너는 지금까지 하나의 자리도 모르고 사냐’고 하셔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지.”

그러면서 후진들에게 조용하면서도 간곡히 당부했다. “너무 조건을 따지지 말라. 공부를 깊게 하면 해결돼. 절대 서원이 굳어야 해. 적어도 300년까지는 우리가 희생할 각오를 한 전무출신들이 되어야 한다.”

남궁 교무는 이어 말한다. "이 지면을 통해 남미교화에 헌신한 장호준·홍정인·김성훈·유영수·조영명·양신덕 교무와 정석심 덕무, 성소윤 정무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 있었기에 남미 개척교화가 가능했다.“

[2019년 12월20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