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시스템이 단합 이끌어
교법 생활화는 교화의 지름길

김수영 교도

[원불교신문=김수영 교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모두가 바쁜 연말이다. 교당은 재가교역자 선임과 새 교화단 편성으로 분주하고, 교단도 이동하는 교무들의 인사로 고심이 많을 때이다. 수많은 자리에 제각각 알맞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분명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간혹 일 많은 교당은 서로 기피한다든지, 교무사회에도 금수저, 흙수저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리면 교도 입장에서 듣기 불편하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내정을 받고도 고사하는 분들의 사정이야 나름 있을 터이지만, 선진들은 백지혈인의 이적을 나툰 사무여한의 신심을 바쳤다고 했는데, 고생스러울 것 같은 부임지는 피하려고 한다니 ‘교무가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가며 근무지를 선택하는 자리였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발령받는 대로 묵묵히 교화에 헌신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지만, 원하는 근무지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원하는 근무지로만 가는 사람이 있기에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6급지의 열악한 교당에서 홀로 몇 사람 몫을 하는 어느 1급 교무는, 얼마나 교도가 그리웠으면 처음 본 교도한테 6급지에서 종신 근무하기를 종용하는 교단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하며 울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불만이 생긴다. 교도들은 전무출신의 일에 대해 분별심을 내지 않으려 하지만 분별할 줄은 안다. 교도들이 보기에도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면 당사자들은 물론일 것이다. 인사를 담당하는 곳에서 마땅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교무들의 사기를 살리는 인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무는 임기가 끝나면 교단이 명하는 대로 옷가방 하나 들고 이동하는 분들이라고 신입교도들에게 설명하면 대다수가 감동한다. 이들의 감동이 원불교를 알아갈수록 실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출가자들이 근무지에 민감한 대신 교당의 재가교도들은 역할에 민감하다. 더러는 스스로 원해서 재가교역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교당에서 재가교역자는 떠밀려서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많은 재가교역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교당과 교단 일에 봉사한 덕분에 오늘의 원불교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되었든 나보다 더 책임감을 갖고 일할 사람들이기에 함께 합력하는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다. ‘미덥지 못하면 쓰지를 말고, 이왕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처럼 소신껏 일 할 수 있게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때 잘나가던 교당이 지금 침체되어 있다면 분명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는 새로운 교도가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우리는 늘 교화를 말하면서 정작 사소한 것에서 일을 그르친다. 대종사의 법이 아무리 좋아도 교당에 처음 온 사람이 그것을 한 번에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새 방문자는 우선 교당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고 ‘괜찮다’ 또는 ‘아니다’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교무와 교도들에게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인간적 성숙함이 느껴질 때 교당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따로 고전을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친구는 전부터 알던 친구가 아니다. 나의 학문이 깊어져 깨달음의 희열을 느낄 정도로 학덕이 갖춰지면, 그 명성을 듣고 배우기를 청하며 찾아오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교법대로 실천하며 법열 속에서 살아간다면, 주위에서 먼저 찾아와 교당 좀 데려가 달라고 할 것이다. 교도인 내가 원불교의 ‘첫인상’이 됨을 잊지 말자.

/강남교당

[2019년 12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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