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준 교무

[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고등학생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무소유의 삶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아서 나중에 나도 소유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출가를 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그래서 가능한 짐을 줄이고 물건을 사지 않고 최소한의 수용품으로 삶을 살고자 했으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대학공부를 위해선 책이 필요했고,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선 컴퓨터가 필요했다. 이것만 해도 매번 빌려서 사용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었다. 보통의 생활을 하면서도 정말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무소유란 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됐다. 무엇을 버려야 무소유가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무리 물건을 적게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소유는 아닌 것 같았다.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고 버려도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봤다. 무소유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참된 소유를 찾는 여정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 물건 이상의 것이 담겨있기도 하다. 간혹은 유행이라는 것도 담겨있고, 문화나 주변의 시선도 담겨있다. 그러다보면 정작 그 물건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 있는 다른 것을 소유하기 바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김장 작업을 하다가 동기 교무와 함께 무거운 물건을 들게 됐다. 그래서 합을 맞춰 물건을 들었는데, 동기의 핸드폰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마침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케이스도 없었던 새 핸드폰은 땅바닥과 충돌했고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그 순간 새 핸드폰을 샀다며 좋아하던 동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핸드폰을 떨어뜨린 동기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금이 간 핸드폰을 보면서 자신만의 튜닝이 됐다며 웃으며 핸드폰을 쭉 사용하는 게 아닌가. 그때 깨달았다, 무소유란 실제로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라는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것임을.

호주 원주민들의 삶을 소개하는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원주민들은 누군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다발이나 보석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멋진 꽃밭을 안내해주거나 예쁜 돌을 잠시 주워왔다가 다음날이 되면 원래 있던 장소에 다시 가져다둔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들은 꽃이나 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요즘 SNS나 미디어를 보다보면 남들의 시선과 유행을 소유하라고 종용하는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남들이 가는 곳을 가고, 남들이 먹는 것을 먹고, 남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지는 소유가 아니라, 내 참다운 마음을 찾아 가지는 참된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12월20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