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산 김성진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원광대학교병원의 초기역사를 이루고 오늘날의 원창학원으로 자리 잡기까지 순일한 공심으로 일관한 면산 김성진 원로교무(81·勉山 金聲振). 이흥과원 간사와 총부간사 등 스승님을 모시고 오직 이 회상에서 공부하는 기쁨으로 출가해 교단의 의료·교육사업과 교화에 매진했다. 충청북도 중원군이 고향인 그는 60여 년 전 중앙총부까지 찾아와 충북지역 최초의 교도이자 출가자의 인연이 됐고, 그를 따라 동생인 김명덕·김진광 교무와 팔촌동생 김명학 교무도 함께 출가하게 됐다. 또한 김 교무의 장남 김태원 교무는 알마타교당, 차남 김태성 교무는 국제부, 셋째 딸 김태인 원무는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에서 활동하며 일원가정을 이뤘다.


오직 스승님 모시는 재미로
김성진 교무는 안동김씨 마을의 한학자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에게만 유산을 남겨줬고, 때문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19세가 되던 해 그는 배울 수 있는 인연, 성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때마침 전라도를 들려 강원도를 가던 친구가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고향을 떠나 외지에 나가서 성공하고 싶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고, 친구로 인해 원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동생들도 나도 성공하려면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친구의 인연으로 주소를 하나 받게 됐지. 그 친구 말이 ‘내가 이흥과원이라는 원불교 기관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는데, 익산에 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주소하나를 받았어. 그게 총부였던 거야. 총부를 찾아가서 윤정운 교무를 찾아가라고 내게 말해줬어.”

원기41년 3월 즈음 그는 총부를 찾아가서 윤정운 교무를 만나게 됐고, 윤정운 교무는 총부를 찾아온 그를 반갑게 맞으며 정산종사에게 인사를 드리려 종법원을 찾았다. “그때 뵈었던 정산종사의 얼굴은 마치 신선이셨지. 또 대산종사가 당시 교정원장이셨는데 그분도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어. 두 분을 뵙고 너무 황홀해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정산종사와 대산종사를 뵙고 그는 발심이 일어났다. 꼭 천상의 세계에 온 듯 한 환희심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과 전무출신으로 평생을 보은하며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이흥과원에서 1년을, 다시 중앙총부에서 4년을 간사근무를 하며 살게 됐다. 총부 생활 속에서 모든 궂은일은 그의 몫이었다. 방마다 불을 때는 일과 식당의 잡심부름, 정산 종법사를 위해 배산에서 약수를 떠 오는 일 등 힘든 일이지만, 그는 돌아보면 총부에서 4년간의 간사생활이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밤 12시나 돼야 내 시간이 생겼어. 그때면 성탑에서 1시간씩 기도를 했는데 한번은 대산종사께서 날 보셨지. 그때 대산종사님이 ‘너 힘들지 않냐’라고 물으셔. 내가 하나도 힘든 일 없고 지금처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만 살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지. 대산종사님이 ‘단전에다가 말뚝을 딱 치고 거기에 마음을 붙들어 매라’라고 가르쳐 주셨어. 정산종사님께서는 ‘편착되지 않고 기울지 않고 중(中)을 잡아야 대도에 들어간다’라고 법문을 해 주셨지. 그렇게 행복하게 간사생활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됐어.” 


교단에 요가문화를 전파
학창시절 인도철학을 관심 있게 공부하고 요가를 배웠던 김 교무는 우리나라에, 교단에 요가를 도입해야겠다는 원을 세우게 됐다. 총부에서 근무할 당시 인연들을 모아 서울에 자리를 마련해 처음으로 15일 동안 요가 시민공개강좌를 열게 됐다. 이후로도 그는 책을 보며 혼자 2년여 기간 요가체위를 연습했고, 전국 각지에 요가강좌를 위해 출장을 다녔다. “대산종사님은 ‘야! 네가 큰 발견을 했다. 요가가 곧 활선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 대산종사님도 요가를 하시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지.” 이때 요가의 시작으로 오늘날 교단은 요가가 수행을 위한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원광대학교병원 설립, 원창학원 재정비
원기57년 재단병원 동화병원이 현상유지가 어려운 때였다. 당시 동화병원을 살려내라는 책무를 맡고 공익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는 동화병원이 번창하고 원불교가 발전하려면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과대학을 만들려면 동화병원이 원광대학교 산하기관으로 등록해야 했고, 당시는 중앙총부의 운영도 어려워 동화병원을 원광대학교에 내주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가 학교를 살려서 병원을 크게 살려야 한다고 대산종사께 말씀드렸지. 그때 원광대학교 부속병원이라는 명함을 달고 물리치료실장으로 근무하게 됐고, 원광대 부속병원 허가를 내 오늘날의 원광대학교병원이 된 것이야. 현재 전무출신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냐고. 원광대학교병원은 전북지역의 최고 병원이 됐어.”

이후 원기63년 대산종사의 하명으로 다시 원광여자종합고등학교로 부임했다. 당시 상과와 문과로 3교실씩 운영하던 종합고등학교제도가 바뀌어 이를 분리해야 했다. 김 교무는 정성숙 고등학교장과 이건춘 중학교장을 보좌하며 원광여중과 원광여고, 원광여자상업고등학교(현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로 분리해 배산 쪽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지금의 원광여고와 원광여중, 원광정보예술고는 이때 이전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대산종사는 낙후된 원광중고등학교도 새로 건물을 짓고 명문사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부촉했다. 김 교무는 고민 끝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만나게 됐다. 

“재단은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대산종사님하고 인연이 있는 김우중 회장을 만나 매달렸지. 대우그룹에서 예전 학교를 인수하고, 우리가 필요한 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부송동에 부지를 마련해 이전하는데 4년이 걸렸고, 원광여고와 원광여중, 원광정보예술고는 15년이 걸렸어. 내가 교육 사업에 몸담고 지금의 원창학원을 이루기까지의 19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지.”

지금의 원광대학교병원이 종합병원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고 원창학원이 명문사학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까지 교단사에 김 교무의 헌신이 숨어있었다. 이후 김 교무는 원기81년 좌산 종법사의 하명으로 종법원에서 원기86년 1월까지 법무실장으로 근무했으며, 좌산 종법사가 다음 임기를 연임해 교단을 운영할 수 있도록 보필했다.


실버문화 창조운동
퇴임을 한 후에도 김 교무는 인생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실버문화 창조운동이 그것이다. 5년 전 그가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만나 60세~80세 실버문화를 위한 계획을 설명했을 때 4억의 지원을 받게 됐다. 또한 익산시의 지원을 얻어 실버문화공간시설을 마련해 테니스와 등산, 댄스스포츠, 장기와 바둑, 상담 등의 실버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실버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외로움, 고독의 문제와 누적된 피로,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게 되는 원인이 있어. 실버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지. 대산종사님께서 내게 당부하신 말씀이 있어. ‘의술이나 약으로도 해결 못하는 병들이 앞으로 생긴다. 네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연구해봐라’라고 말이지. 난 그때 부촉하신 대산종사의 그 경륜으로 지금 이런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고.”

[2020년 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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