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경 기자

학부 때 일이다. 입학하자마자 몇몇 선배들이 구정선사의 신심을 강조하며 그 같은 신성을 키우라는 지도를 했다. 신입생이라서 군기 잡으려 이러는가 싶기도 해서 쉽게 순응하지 못하고 대들었다. “구정선사는 신심이 깊은지 몰라도 지혜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일을 할 때는 뭐가 잘못됐는지 물어도 보고, 그릇된 판단이 보여 진다면 충언을 올릴 줄도 알아야 하죠. 특히 공중사를 처리할 때는 연구를 바탕으로 취사를 해야지 무작정 시킨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취사가 아닙니다. 시비이해를 가릴 때는 분명하게 가려야 합니다.”

아마 예전의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난 오히려 내가 지혜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정선사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분이었다. 시비이해를 초월할 줄 알았던 구정선사에게는 단지 솥을 걸라는 스승의 말씀에, 그 마음에 합일된 취사를 보여줬다. 앞서 난 시비이해를 가려야 된다는 분별만 할 줄 알았지 그것을 초월해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를 모르고 있었다. 

구정선사는 시비이해를 초월한 자리에서 취사 할 줄 알았고, 그 초월하는 마음이 스승에 대한 신성에서 비롯됐으며, 그 신성을 통해서 스승의 법신을 본 것이었다. 우리가 처처불상으로 공부하려면 우주만유에서 법신을 찾을 줄 알아야 온전히 사사불공의 공부가 나투어질 것이다. 그런데 나를 지도하는 스승에게서조차 법신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리의 깊은 도를 깨달을 것이며, 어떻게 일원의 체성에 합할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대종사는 보통급 이후 법위를 특신급으로 내려줬는지 모른다. 

우리가 무시선법의 강령을 따라 동하면 정의 행, 정하면 일심양성을 말하지만, 보통급은 보통급의 수준에서 정의 행을 실행하고, 항마위는 항마위 수준의 정의가 나오기 마련이다. 시비이해의 분별에서만 바라보는 나의 신입생 시절 취사는 분별에 빠져있는 보통급의 취사였으며, 특신급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때문에 그때의 나에게는 스승의 지도가 더더욱 필요했다. 

스승의 지도를 받으려면 계교심을 갖지 않고 온통 바칠 줄 아는 신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올해 신년법문으로 전산종법사님이 ‘신성으로 공부합시다’라는 법문을 내려주셨다. 얼마나 신성에 대한 간곡한 마음이셨으면 그렇게 부촉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 이 간곡한 종법사님의 법문에 누군가 시비이해의 분별심으로 계교하지는 않는가 하는 염려도 든다. 어리석은 짓이다.

대산종사는 “영생을 잘 살기로 하면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스승이 있어야 한다”라고 법문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으로 스승을 모시고, 마음으로 체 받고 살고 있는가. 혹 스승의 지도에 순응하지 못하고 계교하지는 않는가.

[2020년 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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