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인류의 문명에 있어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의 환경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했으며, 덕분에 우리는 지금 그 풍요를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과학문명에 의한 물질적 풍요를 통해 사람들은 ‘행복’을 느낀다. 다만 이 행복은 주로 육체적 오감(五感)을 자극하여 ‘욕망’을 채우는 형태로 나타난다. 곧 과학은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맛보고, 느끼는 물리적 환경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소유’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업이 광고를 통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면서 신상품이 일상의 ‘행복’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주면, 사람들은 삶의 공간을 이러한 상품으로 채우는 것으로 ‘행복’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아니, 믿음도 필요 없다. 물질의 소유는 인간 행복의 너무 당연한 조건이 되어버렸다. 현대인의 ‘행복’은 단지 물질을 소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느림’이나 ‘힐링’이라는 말이 바쁜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제시되고 있다. 문제는 현대인이 ‘느림’을 상품화하여 ‘힐링’이라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매우 빠르게’ 소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템플스테이조차 사람들은 ‘오감’을 자극하는 ‘힐링’의 틀 속에서 소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도시의 답답함과 번거로움을 벗어나 쾌적한 산 속에서 물소리 들으며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음식을 먹으며 다양한 불교 프로그램을 체험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고되고 지친 일상으로 돌아가 이 ‘행복’한 ‘힐링’을 소비하기 위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한다. 
최근에는 많은 종교집단이 앞 다투어 ‘힐링’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있다. 문제는 상품화된 ‘힐링’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 속 고통을 ‘구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 종교의 비극이다.

『정산종사법어』 근실편 2장에서 사람이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영혼의 자유까지 구속하므로, 수양·연구·취사의 삼대력을 양성하여 이 구속을 벗어나는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다. 

인간의 삶은 ‘욕망’의 굴레다. 욕망은 일상을 통해 언제 어느 곳에나 무한 반복적으로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면서 삶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망의 굴레를 일시적인 참회나 노력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일상을 통해 항상 ‘나’라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눈앞에 펼쳐진 욕망의 굴레를 직시하면서 그에 끌리지 않는 취사를 무한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또 생사를 초월하는 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통한 ‘내려놓음’의 실천이 쌓여야 비로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자유를 얻으며, 이것이 바로 생사를 초월하는 참 ‘실력’이 되는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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