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의 진리는 텅 비어 고요하면서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으로, 마치 거울이 비춰지는 영상에 물들지 않으면서 일체를 두렷이 드러내듯이, 본래 무어라 규정할 것이 없는 자리이면서 또한 모든 것이 청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즉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에서 생멸거래가 분명하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에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에서 언어명상이 완연한 것이다. 그러기에 일례로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가 따로 있고 언어명상이 완연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언어명상이 완연한 것이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1장에서 “본래 선악 염정(染淨)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이라며 선악범성의 출처를 소소영령한 공적영지의 광명이라 명시한다.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에 분별망상이 생길 수도 간파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태양이 있기에 밝을 수도 그림자질 수도 있는 격이다. 이어서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이 앞에 나타난다”라고 밝히고 있다. 경계를 대할 때 모든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배경자리를 반조하여 청정한 혜광을 나타내느냐 아니면 경계에 매몰되어 공적영지를 망각하느냐는 차이만 있는 것이다.

분별이 없는 자리이기에 분별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분별이 청정하게 드러나는 당처가 곧 분별이 없는 자리로 이를 텅 비어 고요하면서 신령하게 깨어있는 공적영지의 광명이라 한다. 시끄럽다 조용하다할 것이 없기에 시끄러운 줄 알고 조용한 줄 아는 격이다. 즉 대다 소다 유무다 할 분별이 없는 자리이기에 대·소·유무에 분별이 역력하며,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본래처가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며, 생멸거래가 두렷한 중에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이며, 또한 언어명상이 완연하기에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이와 같이 공적하면서 신령하게 깨어있는 광명을 따라 시방삼계가 장중의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청정한 영지의 광명을 따라 욕계·색계·무색계인 삼계가 두렷이 드러나는 것으로, 욕심이 눈앞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명예나 가치라는 색깔에 붙잡혀 있는 줄 알아차리며, 그러한 색깔마저도 초월했다는 법상(法相)이 남아있는 마음도 훤히 드러내는 것이다.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51장)

결국 법마상전(法魔相戰)하되 마(魔)가 숨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 공적영지의 광명인 법을 항상 앞세워 항마(降魔)하는 것이다. 공적영지의 광명은 경계에 물들지 않는 청정부동하면서 영명한 일원상 광명으로, 이 광명을 놓치고는 정식 법마상전할 수 없으며, 이 광명을 발현하여야 법강항마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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