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의 진리’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조화(造化)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라 마무리 짓고 있다. ‘진공묘유의 조화’는 ‘공적영지의 광명’과 같은 뜻이면서 뉘앙스가 다른 ‘일원상 진리’의 핵심 표현이다.

정산종사는 ‘일원상의 진리와 그 운용법’에서 “일원상의 원래는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생멸거래가 돈연히 공하고 대소유무가 또한 없으며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끊어지고 선과 악의 업이 멸하여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사량으로써 가히 계교하지 못하며 명상으로써 가히 형용하지 못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진공체(眞空體)이요, 그 진공한 중에 또한 영지불매(靈知不昧)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을 통하여 무시광겁에 요요하게 항상 주하고 천만사물에 은현(隱顯)함이 자재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묘유(妙有)”로 진공과 묘유 그 가운데 만법이 운행하는 것을 일원의 인과라 한다. (『원광』 제8호) 즉 묘유의 바탕이 진공이라면 묘유의 발현이 인과로, 진공한 중에 영지불매하고 조화자재한 것이다.

이처럼 일원상은 어떠한 자취도 모양도 없는 진공 자리로써 분별하는 순간 삼천리로 갈리며 잡념에 빠지는 순간 망각되어 버린다. 또한 이렇게 텅 빈 진공체가 묘하게 있으면서 작용하는 본용(本用)을 묘유라 하고, 이 묘유가 시절인연 따라 발현되는 것을 인과라 한다. 마치 거울이 텅 비어 청정하되 대상이 있든 없든 그 비춤 작용은 본래 두렷하여 만상을 대하는 대로 비추듯이 화가 나면 화난 그대로, 짜증이 나면 짜증난 그대로, 기쁘면 기쁨이 슬프면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용이다.

이와 같이 저 산천을 바라볼 때 그 배경은 진공이라면 텅 빈 배경에서 천지작용이 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묘유의 발현으로, 텅 비어 청정한 진공 자리이면서 공(空)으로 묘하게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작용해 밤낮으로 춘하추동으로 생로병사로 흥망성쇠로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우주만유의 바탕은 ‘숨을 은(隱)’이라면 이 자리에서 우주만유의 온갖 모습과 변화가 역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드러날 현(顯)’으로, 은이 현으로 발현되고 현이 은에 바탕하기에 ‘은·현’은 걸림 없이 원융한 한 자리이다. 결국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해서 은현자재하는 것이다.

소태산은 “마음은 무형(無形) 무성(無聲) 무후(無嗅) 무상(無相)이라, 마음의 체성은 허공 같아서 언제나 공허(空虛)한 고로 그 속에는 산하대지·일월성신·삼라만상·우주만유를 포함함과 같이 우리의 마음도 근본적으로 공허한 고로 모든 이치, 모든 사물, 모든 지혜가 잠재해 천종만별의 변화작용을 자유자행(自由自行)하게 된다”(이공주 수필)라고 진공묘유의 조화를 부연해 준다. 이같이 공허한 진공으로 바탕 삼고 그 가운데 다 갖추어진 묘유로써 마음을 작용하라는 것이다. 다만 진공묘유에 계합하여 조화를 부리느냐, 진공묘유로 작용하는 조화에 끌려 다니느냐는 차이만 있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1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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