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 김도천 북일교당 교무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참회게에서는 ‘심약멸시 죄역망(心若滅時 罪亦忘), 마음이 멸함을 따라 죄도 또한 없어진다’고 했다. 마음이 멸한다는 뜻은
정산종사는 ‘성품에서 정신이 나타나고, 정신에서 분별이 나타날 때가 마음이며, 마음에서 뜻이 나타나며 뜻은 마음이 동하여 가는 곳이라 했다’라고 말씀했다. 실제로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마음이 멸해지고 사심이 없이 공적한 가운데 취사가 잘 되더냐라고 묻는다면 말은 쉽지만 취사는 그렇게 바로 되지 않는다. 그만큼 삼대력의 힘이 내 마음속에 충만되어 있고 자성의 본래면목을 바탕해 있어야 마음이 멸해지는 것이다. 

참회게에서의 ‘심약멸시’는 분별식심으로 일어난 마음을 닦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심약멸시는 본래 자성에 바탕, 즉 진공에 바탕해 성품의 본래자리를 잃지 않는 마음의 상태인 묘유로써 활용하는 공부가 우리 삼학공부이다.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하늘에 한 점 부끄럽지 않는 마음인가?’ 묻는다면 나 또한 여기에 자유롭지 못함을 안다. 그래도 표준은 그렇게 닮아가려고 노력한다. 닦고 또 닦고 할뿐이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마음이 부처다. 마음이 멸한다’라는 말들을 분별없는 자리에서 설명해 보자면 굳이 부처라고 할 것도 없고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한 물건을 바탕으로 한다. 이 자리를 들어 표현하자면 굳이 멸하려는 마음이랄 것도 따로 없는 것이다. 굳이 멸하려는 마음의 실체도 없고, 때문에 없애고자 하는 죄성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없애려 할 것이 따로 없기 때문에 마음이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멸함을 따라 죄도 또한 없어진다는 뜻은, 멸할 것이 없기에 바꿔 말하면 분별식심의 실체가 없기에, 그 공한 이치를 확연히 보게 되면 죄업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가령 일상생활 속에서 이론적으로는 털어버리고 내려놓는다는 것이 말로는 되는데 실제 생활 속에서의 내 마음이 그렇게 심약멸시가 되질 않는다. 그래서 정기일기 시간에 참회의 마음으로서 대조하고 시비이해로 심신작용을 챙기고, 대소유무로 진리의 감각 감상을 대조케 하여 오늘도 내일도 유무념으로 마음단전을 체크해야 하는 훈련이 지속돼야 하는 것이다.


자성의 분별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을 모른다는 의미는
대(大)자리와 무(無)자리만 알고 소(小)자리와 유무(有無)자리를 알지 못한 것을 말한다. 한쪽만 강조하지 말고 두루 원만하자는 것이다. 우주는 대소유무로 변하는 자리와 불변하는 자리가 있는데, 어느 한쪽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우리본래 자성자리는 진공묘유한 자리이기 때문에 진공한 자리도 묘유한 자리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밖으로 선업을 계속 수행하면서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공감해주며 소통해야 상생상화하며 낙원세계로 전개 될 수 있다. 

크게 텅 비어있으되 묘하게 다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사참만을 강조하지 말고 이참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쌍수병행 해야 원만구족 해진다. 그래야 균형과 조화가 나오며 상생상화가 될 것이다. 일체가 다 공했다고 하면서 이참만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또한 있는 것만 너무 강조하여 사참만을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이참과 사참을 동행해 표준 하는 공부가 돼야 한다.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는 뜻은
여기에서 전제조건은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해 원래의 내 자신이 부처 같은 심성을 지녔음을 알고 깨닫는 것이다. 당연히 마음의 힘과 위력을 얻어서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주는 업도 마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생사에도 매이지 않고, 착(着)하지 않기 때문에 끌림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참과 이참을 동시에 병행·실천해 마음의 힘을 얻어, 밖으로 선업수행을 하는데 있어 중도에 맞아 세상에서 재색명리 경계에 취할 것이 없을 것이고, 안으로는 마음에 탐·진·치가 공함을 알았기 때문에 버릴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마음과 행실이 감정에 끌리지 않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기 때문에 미움과 사랑에 착심이 없을 것이다.

사참과 이참을 잘하여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치면 대도는 원융하여 원래 선악과 고락이 따로 없기 때문에 따로 취하고 버릴 것이 없을 것이요, 좋고 나쁜 것이 없고 걸리고 막힘이 없으므로 따로 미워하고 사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시비선악과 염정제법이 다 제호의 일미를 이루기 때문에 특별한 취사나 애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는 그렇게 녹록치 않다. 수없이 많은 경계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병행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반조와 자성반조로서 진리에 표준 하는 대조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참회가 신앙문·수행문에서는 어떻게 공부 되는지
일상생활 속에서 곳곳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으로 공들이고, 어느 곳 어느 처지에서든지 일마다 불공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면, 지중한 은혜를 알아서 보은하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 되는가. 인과보응의 신앙문의 핵심내용인 사은사요 공부로 처처불상·사사불공 심법의 보은행을 하면 무아봉공의 심법이 돼 내 자신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신수양과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병행공부 표준이 중요하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선을 하는 심경으로 바르고 어리석지 않으며 그르지 않는 취사를 하게 되므로 병진수행이 중요한 것이다. 일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신성으로 여여한 진리의 그 자리를 체 받고 활용해야 한다. 특히 참회는 안으로 깊은 신앙심에 바탕하고 있어야 하며, 밖으로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느 곳 어느 처지에서든지 부처님 모시듯이 불공하고, 일마다 일터마다 무아봉공의 성자적 심법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곳곳이 부처님이요 일마다 불공하는 신앙의 원력과, 어느 때나 선이요 어디나 선방이라는 수행의 위력이 함께 어우러지되 참회는 신앙의 깊은 바탕에 수행의 아름다운 꽃으로 맺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면이 많다.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차별심으로 보고 취사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살아있는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해 마음에 안정과 위안을 찾고 평화로울 수 있는 주의 조행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아직 우리 교단은 창립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400~500년 결실기라고 했다. 내면과 외면이 과학과 도학이 병진되도록 오늘도 내일도 정성들이며, 소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음양 없는 땅 한조각과 메아리 없는 골짜기의 자리에 합일할 수 있도록 늘 신성으로 정성을 다해야한다. 창립의 역사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밖으로 선업을 계속 수행하고 안으로 쉼 없이 탐·진·치를 제거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2020년 1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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