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중 웃음공장 마술사

독일 세계 거리마술대회 인기상
광주 프린지페스티벌 특별상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세계 30여 개국 180여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진행한 김광중(법명 은중·해운대교당) 마술사.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1월 삼동인터내셔널 10주년 기념 지구촌 문화예술축제에서였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예술가들을 위한 저녁 만찬 자리에서 그의 마술쇼를 접할 수 있었다. 마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기자였지만, 어느새 그에게 빨려 들어가 공연에 집중하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됐다. 감정 표현이 풍부한 아프리카의 젊은 예술가들은 연회장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온몸으로 웃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보디랭귀지와 특유의 의성어로 전 세계 예술인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공연장을 온통 화한 웃음으로 물들이는 그는 분명 실력자였다. 교도 중에 이런 마술사가 있다니…. 그가 궁금해졌다.

인터뷰를 요청하고 그를 만났다. 가장 궁금한 것은 원불교와의 인연. 그가 원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여수에서 군 복무할 때였다. 당시 여수교당에서 군 법회를 주관하러 나오던 김석기 교무와의 법회가 원불교 첫 인연이었다. “교무님이 편안하게 잘 챙겨주셨어요. 원불교를 강요하기보다 교전을 주며 읽어보라고 해서 봤는데 재미있었어요. 둥글게 살라는 말도 좋고, 제가 가진 가치관과 비슷해서 좋았어요.” 전역할 때 꼭 교당에 들리라는 김 교무의 당부에 그는 여수교당을 방문했다. 김 교무는 “너는 평생 웃음을 주는 사람일 것 같으니 네가 이걸 가져라”라며 그에게 이산 박정훈 종사가 쓴 ‘웃음’이 새겨진 나무 액자를 선물했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고 이어진 형상의 웃음이라는 글자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웃음이 된다는 것이 정말 멋있지 않나요? 그래서 사무실 이름도 ‘웃음공장’으로 지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의 명함에 적힌 ‘웃음공장’의 ‘웃음’이 이산 종사의 글자와 닮아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가 마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바로 사람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 다니며 장애우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그런데, 마술하는 친구가 봉사활동을 나오니까 장애우 친구들이 다 마술하는 친구를 따라 가버렸어요. 저도 인기를 얻기 위해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시작한 마술은 쏠쏠한 돈벌이도 됐다. 소질이 있었던 걸까. 고등학생 때부터 마술 공연 제의도 들어오고 마술 강의도 하며 마술이 그에게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됐다.
 

 

“21살에 군대 가기 전까지 3~4년 마술을 했어요. 강의하고, 공연하고 똑같이 흘러가는 삶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나만의 인생을 찾기 위해 전역 후 24살 되던 2009년 호주로 거리공연을 하러 떠났어요.” 영어도 잘 못 하고 집도 구해놓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는 90만 원과 마술 도구만 챙겨 호주로 훌쩍 떠났다. 그의 젊은 패기와 열정이 부러웠다.

“영어를 못해서 보디랭귀지만 하고 스케치북에 몇 가지 메시지를 적어 보여주며 공연을 시작했어요. 첫 공연에서 35달러를 벌고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호주에서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프랑스 한국 대사관, 영국 에딘버러, 벨기에 에카 등 각종 유럽지역축제, 필리핀, 일본 등 점차 세계로 무대를 넓혀갔다. “차비와 숙박비는 공연비로 충당하며 2009년부터 2015년까지 30개국을 돌며 거리공연을 했어요. 2014년에는 독일 세계 거리마술대회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인기상인 ‘베스트코미디상’을 수상했어요.” 그는 광주프린지페스티벌에서 2017년 특별상 수상, 2018년 우수공연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역 후 호주로 떠나기 직전 주현오 여수교당 교도의 소개로 만나게 된 최원심 교무는 그가 외국에 있을 때도 전화와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멘토 역할을 해 주었다. 호주에서의 생활도 안정되며 또다시 그에게 ‘내가 뭐 하려고 이렇게 살지’하는 삶의 의문이 몰려왔을 때 최 교무는 “순간순간이 모여서 너의 미래를 만드니 가치 있게 보내라”라고 조언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의 미래라고 말하는 교무님의 말씀이 저에게 삶에 의미를 부여해줬어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 결심했죠.”

전 세계를 돌며 성장해 온 그의 길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호주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로 얻어맞기도 하고, 프랑스에 갔을 때는 현지인 공연자가 방해된다며 제 마술 도구를 모두 다 부수기도 했어요. 2015년 4월 아시아투어 중 네팔에 갔을 때는 네팔 대지진을 만나기도 했죠.” 긍정적인 성격 덕분인지 그런 일들은 그의 길을 크게 방해하지 못했다. 네팔 대지진 시 여자친구와 함께였던 그는 살아남으면 결혼하자 약속했고 그해 가을 그들은 부부가 됐다. 결혼 후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봉사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2018년 “냉난방쇼”를 기획해 현재까지 70회 이상 전국봉사순회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더울 때는 시원함을, 추울 때는 따뜻함을 전달하겠다는 취지라는 그의 기발함이 엿보인다. 

사람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전달하고 싶다는 그가 바람을 전했다. “마술을 보고 사기니, 마법이니 의심하며 시비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인생을 살면서 즐길 수 있는 매개체로 보고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2020년 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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