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윤 교무

[원불교신문=현지윤 교무] 대종사는 낮은 인연일수록 가까운 데서 생겨난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나 부부 사이, 친한 친구 사이 같은 가까운 사이에 가깝다는 이유로 예(禮)를 차리지 않고 조심하는 생각을 두지 않아서, 서로 생각해 준다는 것이 서로 원망을 주게 되기도 하고, 서로 가르쳐 준다는 것이 도리어 오해를 가지게 되어 인연 없는 사람만도 못하게 되는 수가 허다하다고…. 그래서 가까운 사이에 더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가까운 인연, 개인적 차이가 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엄마와 딸이 아닐까.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첫 수업시간 남이 되어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한다. 

‘나는’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글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떠올려 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나를 소개하는 글을 써야 할 때 여학생들은 누구의 시선으로 글을 쓸까? 

대부분 학생이 엄마의 시선으로 ‘우리 딸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글을 읽다 보면 자신의 성격과 장단점 등 객관적 시선으로 본인을 정확히 바라보는 능력에 한번 놀라고,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하는지를 어쩜 그리도 잘 알고 있는지 다시 한번 놀란다. 수업 공개의 날 어머니들께 자녀의 글을 공개하면 나와 똑같은 감상이 든다고 한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 것 같은 사람, 어쩌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엄마임에도 중학생 딸은 엄마와 갈등이 많다. 

엄마의 말대로 움직이고 엄마가 골라주는 친구와 어울리던 예쁜 딸, 이제는 없다. 딸은 이제 친구의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집에서는 혼자 있고 싶고, 그런 딸이 엄마는 서운하다. 변한 딸의 모습이 서운하고 두렵다는 갱년기 엄마와 이제는 엄마의 사랑이 간섭으로 느껴지는 사춘기 딸은 매일 전쟁이다. 가족 특히 이 시기의 엄마와 딸은 언제나 직설법으로 말하는 사이다. 친구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날것의 말을 내뱉고 돌려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후련하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러므로 가족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야말로 제2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우므로 가족의 언어야말로 온도와 열기를 식힐 중간의 번역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솔직할 필요는 없다. 

가족 사이에도 거리와 짐작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가족의 마음이 거칠 수 있는 언어의 섬, 그런 중간지대를 마련해 볼 필요도 있다. 대종사님가 말씀한 조심하는 마음, 공경하는 마음, 예(禮)를 갖추는 마음이 그것이다. 거리를 두자. 혹자는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타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만나서 반가운 인연일 뿐이다. 

/휘경여자중학교

[2020년 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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