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라 밝히고 있다. 또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반야지(般若智)라 부연하는데(『불교정전』), 이는 ‘무분별의 지혜’로 공성(空性)의 지혜를 뜻한다.

소태산은 『회보』 제40호에서 “자고로 인물도 잘난 것을 보고 ‘원만하다’하고, 일처리도 잘 된 것을 보고 ‘원만하다’하나니, 원만이란 것은 곧 일원상을 이름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즉 ‘원만’은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모나지 않는 일원상 그대로를 뜻한다.

예를 들어 물이 꽉 찬 병은 바깥의 물이 밀고 들어올 수 없듯이, 원만한 자리는 일체의 다른 것에 오염되거나 가감되지 않는 결함 없는 온전한 자리이며, 또한 원만하기에 잡념이 어찌할 수 없는 사념이 본래 텅 빈 자리이다.

정산종사법설에서 “원만은 두렷하여 결격(缺格)이 없는 것이니, 두렷하기로 하면 모든 분별이 끊어져 없어야 참 그 자리가 두렷할 것이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분별이 끊어질 때 두렷한 자리가 현전(現前)하는데 이 자리를 원만하다한 것이다. 이어서 “구족은 일호의 부족함이 없이 다북차 있는 것이라 분별이 없는 그 자리에 빠짐없이 우주의 삼라만상과 염정(染淨)이 다 구비하여 있나니라”하며, “이러한 까닭에 분별없는 것이 참 분별이요 분별이 없기에 이것이 원만구족이니라”라고 명시한다.

본래 염정이 없기에 염정이 두렷하며 분별이 없기에 참 분별이라는 것이다. 만일 요란한 줄 아는 자리에 무어라 할 분별이 있다면 요란함이 그대로 드러날 수 없는 격이다. 경계를 따라 요란해질 경우 그 요란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청정한 본래자리를 원만하다하며, 요란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청정지혜가 두렷한 자리를 구족하다한 것이다. 원만구족은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기에 분별이 또한 두렷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그리고 『정산종사법설』에서 “일원의 진리가 만약 사정(私情)이 있다면 잘난 사람에게는 있고 못난 사람에게는 없을 것이며, 죄복을 주는 것도 친소(親疏)를 떠나 오직 지공무사하기에, 일원의 진리는 없는 곳이 없으며 일원의 진리 아님이 없나니, 이와 같이 죄복의 보응도 친소와 사정이 없이 오직 지은 바에 따라 죄복을 주는 까닭에 곧 지공무사이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 요란한 줄 아는 자리에 사사(私邪)가 있다면 요란함이 요란함 그대로 드러날 수 없듯이, 요란함 그대로 드러나는 지공무사한 자리에는 삿됨이 붙을 수도 침범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공변된 자리이다.

이와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은 수행의 표본이요 육근사용의 표준 (『일원상법어』)이므로 이에 근거하여 수행하라는 것이다. 특히 ‘지공무사’한 자리는 소태산 마음공부의 특징이므로, 원만구족할 뿐만 아니라 지공무사하게 마음을 작용하라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1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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