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화 강남교당 교무

“아는 게 많고 갖춘 게 많을수록
자신을 비우기란 힘들어
어려울수록 법맥을 대어
태산 같은 신성으로 해결해야”

정인화 교무

[원불교신문=정인화 교무] 원기105를 재미 삼아 풀어 보면, 1은 자기 자신(I)이고요 영(0)은 텅 비움이며 (5)는 깨달음을 뜻하는 오(悟)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해석입니다. 전산종법사께서는 올해 법문의 제목으로 ‘신성으로 공부합시다’를 제시하셨습니다. 신앙인의 믿음과 근기를 역설하신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신앙인들의 중요한 덕목으로 지도자들은 믿음, 신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란 대체로 진리에 대한 신념, 신에 대한 의지, 구원의 갈망, 구세주를 향한 인격적 신뢰이자 가깝게는 공동체 구성원간의 연대감을 말하겠지요.

새 시대의 구세성자로 오신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복혜의 원천인 일원의 진리를 천명하시어 모든 인류가 다 같이 복과 혜가 구족한 광대 무량한 낙원에서 살 수 있는 길로 우리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자신이 교주이거나 미륵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몸부림치는 생활인이셨습니다. 그는 이런 복과 지혜의 근원인 일원의 진리를 세상에 알리시고 광대무량한 낙원을 만드는 방법과 자세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셨습니다. 그것은 관념적이거나 모호한 영적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기존 종교의 문제점을 기반으로 존립의 근거를 삼으신 게 아니라 시대와 삶에 맞게 종교를 풀어내는 신앙의 프로세스를 세상에 알려주신 것입니다.


네 가지 특별한 신심
생활 속에서 불법을 닦고 실천할 수 있도록 신앙과 수행의 과정이 물샐 틈 없이 짜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법에 맞게 따라 가면 한량없는 복과 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심이 필요합니다. 지식이나 재주, 덕성이나 건강, 재력이나 권력보다도 신성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신심은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며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된다. 신이 없는 공부는 죽은 나무에 거름하는 것과 같으므로 독실한 신을 세워야 마침내 그 공부가 결과를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세상 이치와 부모님의 마음을 잘 모르지만 일단 부모를 믿고 따르며 살아가지요. 이게 가능하려면 부모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존재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성장 과정에서 대종사님은 우리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들 마음에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신(信)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原動力)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심이란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로 그 스승을 비방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혹 직접 보는 바에 무슨 의혹 되는 점이 있어도 거기에 사량심을 두지 않는 것이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순간 의심이 사라지고 불안도 사라집니다. 또한 그는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하며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이 신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천진한 어린이는 아무런 상이 없이 ‘내가 하겠다’ 하는 의지와 자력을 세워가는 모습이라 이쁘기라도 하지만, 머리가 크고 아는 게 많아지는 아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내가’라는 주견과 고집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되곤 합니다. 내 주견, 내 경험, 내 생각에 고집하는 사견이 남아 있으면 완전한 신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스승이 어떠한 방법으로 대하더라도 다 달게 받고 조금도 불평이 없는 것이 신이요, 스승의 앞에서는 자기의 허물 등 모든 것을 조금도 속이지 아니하고 사실로 직고하는 것이 신이니, 이 네 가지를 구비하면 특별한 신심이라 능히 불조(佛祖)의 법기(法器)를 이룬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특별한 신심을 갖추어 일원대도 영겁법자가 되고 일원회상 영겁주인이 되어 일원대법륜을 굴려야 하겠습니다. 


중근의 고비를 넘으려면 처음의 발원을 다시 챙겨야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롯 유다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유대지도자들에게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깁니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 중에 회계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비교적 배운 사람 축에 들었고 두뇌 회전이 빠른 현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유능한 인물이 예수를 배신한 것입니다. 

『대종경』 신성품 2장에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공부인의 근기(根機)가 천층만층으로 다르나 대체로 그를 상·중·하 세 근기로 구분하나니, 상근기는 정법을 보고 들을 때에 바로 판단과 신심이 생겨나서 모든 공부를 자신하고 행하는 근기요, 중근기는 자세히 아는 것도 없고 혹은 모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의심을 풀지 못하고 법과 스승을 저울질하는 근기요, 하근기는 사(邪)와 정(正)의 분별도 없으며 계교와 의심도 내지 아니하여 인도하면 인도하는 대로 순응하는 근기라, 이 세 가지 근기 가운데 도가에서 가장 귀히 알고 요구하는 것은 상근기이니, 둘째로 가히 인도할 만한 것은 하근기로서 독실한 신심이 있는 사람이니, 이 사람은 비록 자신은 없다 할지라도, 법을 중히 알고 스승을 돈독히 믿는 데 따라 그 진행하는 정성이 쉬지 않으므로 필경은 성공할 수 있나니라. 그러나 그 중에 가장 가르치기 힘들고 변덕이 많은 것은 중근기니 이 사람은 법을 가벼이 알고 스승을 업신여기기 쉬우며 모든 일에 철저한 발원과 독실한 성의가 없으므로 공부나 사업이나 성공을 보기가 대단히 어렵나니라.” 자신이 아는 게 많고 갖춘 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좌산 상사님께서 늘 강조하신 말이 있습니다. ‘큰일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한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능력으로 통하는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회상 초창기에 9인 선진님들이 무슨 힘으로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산 종사님과 삼산님을 제외하고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습니까. 또 무슨 돈이 있었습니까? 다만, 대종사님을 새 시대 주세불로 믿는 그 신성 하나로 수 천 년 버려진 언답을 막았고 혈인의 기적을 나투시었으며 그 힘으로 오늘의 익산총부를 건설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법과 스승과 회상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진리에 대한 목숨과 바꿀 수도 있는 신심이 없었더라면 과연 가능했을까요? 신심이 부족했다. 혹은 스승의 언행과 처세에 문제가 있기라도 했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쉽게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부처의 법기는 이 우주를 다 담을 만큼 아무리 법을 담아도 넘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나의 법기가 얼마나 큰가를 알고 싶으면 나의 신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대조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래서 중근의 고비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고 하셨고 중근의 고비를 넘으려면 처음의 발원을 다시 챙기고 신심을 돈독히 하라 하셨습니다. 대산 종사께서는 법마상전급의 중근과 법강항마위의 중근을 말씀하시며 ‘상전급의 중근은 혹 자력으로 넘어설 수도 있으나 항마위의 중근은 반드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으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세성자는 우주의 대 진리에 합일하여 무한동력을 얻으셨으므로 우리가 신성을 바치면 그 힘을 타서 제생의세의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원대도의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깨달은 진리를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 은혜의 소종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기도 하지만 믿음이라는 신성을 통해서도 깨달음과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신심을 저버리고 망각한 채 관습적 인간관계로 풀려 하거나 어설픈 꼼수나 편법을 사용하려 하지 말고 그런 때일수록 태산과 같은 믿음으로 진리에 맥을 대고 법과 스승과 회상에 맥을 대어 신성으로 해결하고 신성으로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강남교당

[2020년 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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