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선배나 친구들로부터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내가 왕년에는 말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다. 화려하고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 추억의 회상이겠지만, 과장되고 허풍 섞인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왕년’을 회상하는 사람들 중에 현재 그 분야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곧 ‘왕년’을 강조하면 할수록 적어도 지금은 쇠퇴하고 한 물 갔다는 반증이며, 초라해진 현실에 대한 자기 위안의 푸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거기에 잘 나갔던 과거처럼 대접받으려는 욕망을 뒤섞어서 분출시킬 때 사람이 추해진다.

만약 지금 주변에서 누군가가 열렬히 ‘왕년’을 외치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또 그때의 위세를 뽐내려고 한다면 그 스스로가 이미 꼰대이고, 퇴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왕년’을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꼰대는 나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사람에 비해 지금도 잘 나가거나 계속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왕년’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의 자신을 성찰하며 꾸준히 자기를 혁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왕년’에 머물 여유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도 진리의 소식을 모르는 한 언제든 왕년의 굴레에 떨어질 위험이 잠재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산종사법어 근실편 5장에서는 “사람이 한 때의 이름을 드러내기는 쉬우나 그 실을 충실히 쌓기는 어려우며 일시의 드러나는 선행을 하기는 쉬우나 그 근본적 선근을 배양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한 때 또는 요행으로 이름을 드러낸 적이 있더라도, 그것을 오래 이어갈 수 있고 없음은 바로 실력의 있고 없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우리가 대소유무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지 못하여 항상 허망하고 요행한 데 떨어져 결국은 패가망신의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며, 인과의 이치에 따라 지은대로 결실 맺는 이치 속에서 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영원한 세상에 순환불궁하는 이치를 알고 믿으며, 늘 텅 빈 진리처럼 나를 내려놓는 공부를 하고 또 쉼 없이 복 짓는 일을 쉬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허망한 왕년에 묶이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성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추천교무인 류기현 종사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의 창조’라는 말을 강조해 줬다. 나에게 어떤 여건이 주어지든 그 속에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곧 인간 실존의 참된 가치를 구현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왕년의 허망함에 묶이지 말고 오늘 하루 참된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그러한 하루를 매일 충실히 쌓아가는 것이 바로 참 인간됨의 삶이며, 참 실력을 쌓는 진리의 길이 아니겠는가.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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