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언어도단의 입정처(言語道斷-入定處)는 일원상 자리이다. 입정처는 일원상인 성품에 계합한 자리로 수양의 경지로만 한정해서 사용하면 맥락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초기교서인 수양연구요론의 결론에 초심→발심→입지→수양→연구→취사→세밀→입정(入靜) 순의 ‘공부의 진행순서’와 각 단계에 대한 ‘주해’가 붙어 있다. 이 8단계 공부를 정전 법위등급의 시원이라 볼 수 있다. 이중 최종단계인 입정(入靜)은 “일분일각이라도 마음이 자성(自性)을 떠나지 아니하며 응용(應用)하여도 생각이 없는 때이라”라고 주해하고 있다.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자성을 동정 간에 여의지 않는 경지가 곧 입정(入靜)으로 경계를 대해 육근을 작용해도 분별사량하는 생각이 끊어진 때라는 것이다.

또한 소태산은 “내가 회상을 연지 근 30년간에 너무 해석적으로 정법을 설하여 주었으므로 상근기는 염려 없으나 중하근기는 쉽게 알고 구미호가 되어서 참 도를 얻기 어렵게 되니 실로 걱정되는 바이다. …이후부터는 일반적으로 대략 수행길을 잡은 공부인은 선 때나 평상시를 막론하고 염불 좌선과 주문 등으로 일심을 통일하는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대종경선외록 원시반본장 3절)며 ‘일심통일’을 강조한다. 

결국 수양연구요론의 입정은 수양에 한정된 상태가 아니라 일원의 체성에 합한 경지이며, 『대종경선외록』의 일심통일도 일원상에 합일된 경지의 다른 표현이다. 삼학의 방법론에만 빠지지 말고 일원상 자리인 입정과 일심을 체득하라는 것이다. 

즉 입정(入靜)과 일심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응용하여도 분별집착하는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경지이다. 입정처는 설사 경계에 끌려 요란해 진다해도 요란한 줄 아는 마음당처는 본래 여여부동한 자리로, 경계를 따라 분별집착하는 언어명상만 내려놓으면 눈앞에 현존하는 본래 두렷하고 텅 빈 자리이다. 염불·주송하는 그 당처, 단전주하는 그 당처는 망념이 어찌할 수도 잡념이 끼어 들 수도 없으며, 번뇌가 치성해도 본래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물들지도 않는 자리이다. 즉 정(定)하면 정(靜)하기에 입정(入靜)은 입정처(入定處)이다. 

개는 먹이를 던져주면 그 먹이를 향해 달려가나 사자는 먹이를 던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든다. 보통은 던져주는 먹이를 쫓아가는 개처럼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그 마음에 사로잡힌다. 이때 경계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그 마음 바탕을 직시하는 것이다. 마치 먹이를 던지는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사자처럼 지각의 방향을 돌이켜 직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어명상의 길이 끊어진 입정처에 들기 때문이다. 언어명상이라는 먹잇감에 홀리어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분별사량하는 언어명상의 추구만 곧장 멈추면 항상 현전(現前)해 있는 요동 없는 여여한 자리에 들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의 일심통일의 요구는 언어도단의 입정처인 일원상에 직입하여 동정 간에 이 자리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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