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불가에서는 부처의 음호(蔭護)를 자비(慈悲)라고 설정(設定)했다. 유가에서는 공자의 음호를 인(仁)이라 설정했다. 선가에서는 노자의 음호를 도덕(道德)이라고 설정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음호를 사랑이라고 설정했다. 이러한 자비와 인과 도덕과 사랑은 각자의 종가(宗家)를 창시했던 성자의 구인제세(求人濟世)의 의지(意志)이다. 즉 성자들이 인간(혹 전체 생령일 수도 있다)을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애민(哀愍)하게 여겨서 구원하고 세상도 전쟁이나 혼란으로 인해 만신창이(滿身瘡痍)간 된 상황을 구제하려는 단심(丹心)을 가장 짧은 단어에 담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음호(蔭護)를 은(恩)이라고 했다. 이 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숨결을 듣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현상을 네 가지로 구별하여 무루복락(無漏福樂)의 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비나 인이나 도덕이나 사랑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받아드리면 저절로 구원이나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대종사의 은은 기본적인 음호도 있지만 질시로 그 대상에 대한 보답을 함으로서 복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배지은로(報背之恩路)를 제시해 보은을 하면 하는 만큼 복락을 얻을 수 있고, 배은을 하면 하는 만큼 죄고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보은이란 어떤 의미일까? 보은은 ‘은혜를 갚는 행위로 사은의 큰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이니 인간은 누구나 사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그 은혜를 느끼고 감사하며 나아가 보은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활감사(生活感謝)가 되고 일상보은(日常報恩)이 돼야 한다. 감사를 하고 보은을 하는 것이 특별한 것도 아니요 또한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물마시듯이 밥 먹듯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의 소시소급(所施所及)이 특정이나 특한(特限)되어 있지 않고 무소부접(無所不接)하고 무소불급(無所不及)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은의 방법을 불공(佛供)으로 제시했다. 불공이란 ‘부처님께 헌공하는 공물’이라는 뜻이다. 곧 ‘불전공양(佛前供養)’의 준말이다. 그러므로 보은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 앞에 공양을 드리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송(頌)하기를 
本恩非做作  본래 은은 조작된 것이 아니요
施惠未徒爲  베푸는 은혜 헛되게 함이 아니네
萬物斯中活  만물은 이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不知厥澤垂  그 혜택 드리움을 알지 못하여라.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0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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