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서원문’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의 도가 끊어진 입정처요 유무를 초월한 생사문인 것이다. 이 ‘유무초월의 생사문’의 유무초월은 생사문을 수식하는 설명어로 일원=유무초월=생사문이다.

유무초월(有無超越)은 변하는 유라 한 즉 어느새 불변하는 무에 바탕하고, 불변하는 무라 한 즉 어느새 변하는 유로 드러나서 유라고 단정할 수 없고 무라고 한정할 수 없는 자리이다. 즉 유와 무가 서로 바탕해 한 두렷한 기틀을 짓고 있는 자리이다. 

지금 개가 짖고 있다 할 때 그 듣는 당처는 개소리에 한정될 수 없는 무분별의 자리이면서 또한 개소리가 생멸하는 분별이 역력한 자리이다. 이처럼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한 생각이 출몰하며, 생각이 출몰하되 그 바탕은 일체의 흔적이 없는 텅 빈 자리다. 없는 자리에서 있는 자리가 드러나고, 있는 자리는 없는 자리에 바탕해 있는 것이다.

생사문(生死門)은 유무초월한 자리로써, 문(門)은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면서 안팎을 다 포괄하는 지점이듯이, 생사문은 생도 아니요 사도 아니면서 생이기도 하고 사이기도 한 자리이다. 즉 생사를 초월한 가운데 생사변화 하는 자리로, 생사가 출몰하되 그 출몰하는 낙처(落處)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즉 생사를 초월해서 생사를 드러내는 자리이며, 생사를 드러내되 생사에 오염되지 않는 자리이다. 이처럼 유무초월의 생사문은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의 ‘일원상 게송’과 한 자리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자리를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대종경』 천도품 5장)이라 하며, 자성의 분별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을 모른다면 유무초월의 참 도는 모르는 것이라 한다.(『정전』 참회문) 분별변화가 역력한 그 바탕이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분별이 없는 청정한 자리에서 분별이 두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무초월의 생사문은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며, 또는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며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써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의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 하는 진공묘유의 조화이다.

결국 유무초월의 생사문은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서 고락이 분명하며, 선악을 초월한 자리에서 선악이 선명하며,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서 생사 변태가 확연하게 나타내는 문(門)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유(有) 속에 불변하는 무(無)가 있고 불변하는 무 속에 변하는 유가 있는 일원상을 체득해 생사초월처에 바탕하여 한 생각을 나투고, 한 생각이 출몰하는 중에 생사초월처에 드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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