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김혜광 원로교무

우산 김혜광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남다른 안목으로 어려운 초기교단 환경 속에서도 교육학을 전공해 원불교의 대 사회화 활동에 힘쓰고 있는 우산 김혜광 원로교무(70·愚山 金慧光). 그는 팔산 김광선 선진의 손자이다. 그의 선친 설산 김병철 교무가 바로 팔산 종사의 셋째아들이다. 

“팔산님이 가세가 그렇게 어려운 분은 아니셨는데, 교단에 다 헌공을 하셔서 사가에 있는 자식들 고생이 말로 못 할 정도였어. 선친도 교무를 하셨기 때문에 얼굴을 잘 뵙지 못했어. 가난에다가 어려움이 농축된 대로 살아서 뭘 잘 몰랐어. 집안에 출가자가 10여 명이 돼. 오직 그렇게 가는 길만 있나보다 생각했지.” 원평교당 창립주인 이만갑 할머니가 외증조모로 그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교단과 인연이 깊다. 


교육학에 대한 서원
원불교학과 진학 후 군 복무를 마치고 그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당시 해룡농업기술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현도 원로 교무의 요청으로 한동안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영어도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는 부교무 역할을 했어. 이현도 교무님을 모시고 생활 하면서 앞으로 교단과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

그는 그 시절 다른 학문보다도 제2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하며 느꼈고, 힘이 닿으면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서원을 세우게 됐다. 또한 교육학을 공부하면 교단의 교육문제와 관련해서도 보은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후 그는 교정원 교육심의위원으로 6년간 활동했으며 퇴임 때까지 원광대학교 교육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김 원로교무의 저서 『학교에서 종교교육의 이해』는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된 바 있다. 

김 원로교무의 첫 부임지는 수위단회 사무처였다. “그때는 독립기구가 아니라 총무부와 같이 병립했는데 김인철 교무님이 당시 총무부장을 하시고 나 혼자 사무를 봤어. 김인철 교무님은 준비가 철저한 어른이셨어. 사리연구가 무서울 정도였지. 추진력도 무섭고 주변의 좌우 동지들을 다 잘 챙기셨어. 일에서는 깐깐하셨는데 지내고 나니 큰 공부가 됐지.” 

박광전 교무가 당시 수위단 중앙 단원이었다. “박광전 교무님은 과묵하셨어. 말씀을 많이 안 하시는데도 정곡을 찌르셨어. 당신이 몸으로 다 보여주시는 어른이었지.” 그가 수위단회 사무처 근무를 마치고 교육학 공부를 위해 고려대에 진학했을 때 이공주 선진이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교육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도 반대하고 주변에서 다들 반대가 심했어. 그런데 이공주 선진님은 공부를 하라고 응원하고 적극 후원해 주셔서 고려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와 박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 참 고마운 분이셔.” 

 

전 원광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원불교 대사회화에 힘써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준비해야,

전문성 확보 중요


이웃종교에 원불교 알리는 가교역할
“대학에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라고 한다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한국종교교육학회 회장을 한 거야. 불교학에 인연이 있으신 분이 그 학회를 만드셔서, 역대 회장이 동국대에서 많이 나왔어. 원광대학에서 회장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회장을 맡게 됐어.” 그는 학회장을 하는 동안 이웃종교 간 협력 및 소통, 학문 활동을 위한 교단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기여했다. “불교, 가톨릭, 대순진리회 등 여러 종교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 이 학회에서 활동했어. 지금도 많이 소통하고 있지. 한번은 서강대학교 이사장인 신부님이 한번 보자고 해서 서강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서강대 교수들이 다 모여있었어. 원불교에서는 인성교육을 어떻게 하냐고 묻더라고.” 그 밖에도 이웃종교에서 원불교에 대한 강의를 요청할 때, 그는 여러 교무들을 추천해 이웃종교에 교단을 알리는 가교역할을 했다. “지방대학에 있는 사람이 학회 회장을 하기 힘든 데 분에 넘치는 일이었어. 고마운 일이고 보람이 있었지.”

그는 원광대학교에 원불교 관련 개설 과목이 현재 ‘종교와 원불교’, ‘선과 명상’ 등으로 다양하지 못함에 아쉬움을 전했다. “동국대에 가니까 불교학 외에도 관련된 교양과목이 수십 개가 돼. 불자 교수가 불교학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강의도 하니까 기반이 탄탄해. 예전에는 신방과, 음악과, 철학과 등 교수 교무들이 많았는데 전부 퇴임하고 세분 밖에 안 남았어. 대학이 교화의 못자리가 될 수도 있는데 주변의 기반이 잘 갖춰지지 못해서 아쉬워.”

 

원불교의 대 사회화 활동
유튜브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익산학 심포지엄, 종교예방교육, 청소년 관련 교육 등 김 원로교무의 다양한 활동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 “퇴임 후 두 가지 일에 주력하고 있어. 그중 하나는 지역사회에 원불교를 알리는 일이야.” 익산시에서 전자문화대전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중·고등학생들이 검색해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정부지원 사업에 그와 양현수 원로교무가 함께 참여했다. 그 인연으로 원불교와 관련된 부분을 글로 쓰기도 하고 익산 시민들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교단이 익산시와 관련돼서 한 활동이라던지, 야학이라던지 여러 활동을 많이 했는데 잘 밝혀져 있지 가 않아. 시민들도 잘 모르는 것이 많고, 익산시에서 우리 교단의 위상이나 역할을 알리는 데 할 일이 많아.” 

그가 주력하는 또 하나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국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종교차별예방교육을 진행하는 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에서 주관하는 종교차별예방교육에 교단에서는 김 원로교무가 유일하게 함께하고 있다. 공직자가 업무를 수행할 때 특정 종교에 편향되지 않게 하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국가기관, 중앙부처 각 산하기관 등 150여 기관에서 10년 넘게 교육을 해왔지. 원불교 학과 소속 교수가 아니니까 가능한 일이었어. 개인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국가 사회나 교단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다 싶어서 앞으로 1~2년은 더 할 예정이야.” 그는 종교차별예방교육을 이어갈 수 있는 후임교무를 찾고 있다. 


치열함 속에서 힘을 얻어야
후진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를 요청하자 그가 말했다. “치열하게 준비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바로 도태돼. 사회적 지위로만 되는 시대는 끝났어. 교무들도 앞으로 생존하려면 지금처럼 느슨한 형태로는 통하지 않아.”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에 절박함이 함께 전해졌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며 교무로서의 전문성을 갖춰야 함을 강조했다. “교전이 한글로 되어 있다고 쉬운 것이 아닌데 너무 쉽게들 생각해. 한 자 한 자 깊은 의미가 있어. 난 요즘 똑같은 것을 여러 번 봐. 여러 번 읽고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교법으로 공부하면 과연 성불이 되는 것이냐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나는 우리 교법으로 하면 된다고 하셨기에 믿고, 또 실제로 할 수 있다고 느끼고 제대로 하면 반드시 된다고 생각해. 이웃 종교와 비교해서 무슨 경쟁력이 있느냐는 이야기도 듣는데, 우리의 강점은 생활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야. 이웃종교는 공부와 생활이 분리돼 있어. 우리 교법의 우수성이 육근을 통해서 나퉈지고 확인돼야 해. 일상생활 속에서 힘을 얻고 수행해가야지 다른 수행단체가서 하고, 난 그런 것에 별로 동의하지 않아. 우리 교법에 대한 자신감, 신념은 내생에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

[2020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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