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학창시절 필자에게는 ‘일원상 서원문’ 중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은생어해(恩生於害) 해생어은(害生於恩)’, 곧 해독에서 은혜가 나타나고 은혜에서 해독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일원(一圓)은 곧 법신불(法身佛)이요, 법신불은 곧 사은(四恩)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보면 은혜는 절대선(絶對善)으로 봐야 할 것인데, 이 절대선에 해로움을 일으키는 악의 씨앗이 포함돼 있다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불교의 선인복과(善因福果) 악인죄과(惡因罪果)와 같은 인과론에 비춰 보면 생각이 점점 미궁으로 빠져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대종경 인도품 17장 법문을 통해 의외로 쉽게 풀렸다. 이웃집 가난한 사람에게 약간의 보시를 하고 그 혜택을 보며 복을 짓고 받는 이치를 깨달은 구타원 이공주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복이 죄로 화하는 이치’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복이 죄로 화하는 이치는 복 지은 사람이 복 지었다는 관념과 상을 놓지 못하고, 상대가 그 마음을 몰라주면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해 애초의 은혜로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원망하는 마음만 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내가 무언가를 줬다는 상을 버리지 못하면 은혜를 베풀어 복의 씨앗을 심은 사람이 도리어 그 은혜로부터 자신의 죄의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생어은’이며, 반대로 어떠한 어렵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사와 보은의 생각을 놓지 않고 그 어려움 속에서 은혜의 씨앗을 심어가는 것이 바로 ‘은생어해’다.

사람이 복을 짓되 그 지은 복이 죄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복을 짓고 내가 그 복을 지었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죄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누군가에게 해로운 일을 했을 때 그 죄가 은혜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해로움이 나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새로운 은혜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종사는 이를 다시 ‘유상보시’와 ‘무상보시’의 차이로 설명해 주셨고,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상 없는 베풂이 곧 ‘응용무념의 도’이니 모든 상을 초월한 그 자리에 합일하는 것이 바로 ‘사은’과 합일한 자리요 일원의 진리와 합일한 자리가 된다.

정산종사법어 근실편 7장에서는 소인의 선은 잘 묻히고 악은 잘 드러난다고 했고, 또 군자의 허물은 잘 묻히고 선은 더욱 드러난다고 했다. 소인은 작은 선을 행하고 그 대가를 바라거나 그 작은 복으로 큰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므로 죄가 멸할 날이 없고, 군자는 무상과 무아의 심법으로 죄를 참회하고 늘 상 없는 선을 행하므로 그 선이 항상 드러난다는 말이다. 일상을 통해 은생어해가 아닌 해생어은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일원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하는 참 실력을 얻게 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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