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서원문에서 ‘유상으로 보면∼’과 ‘무상으로 보면∼’의 결어는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다’로 맺고 있다. 유상으로 보아도 무량세계이고 무상으로 보아도 무량세계라는 것이다. 

‘무량세계’는 없을 무(無), 헤아릴 량(量)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다. 즉 유상으로 보면 전개되는 무량세계는 무엇이라 할 것이 없는 불변의 무량세계라면, 무상으로 보면 전개되는 무량세계는 다할 것이 없는 변화무궁의 무량세계이다. 

또한 전개는 펼쳐 열어 벌여놓았다는 뜻으로, 유상으로 보면 능히 이렇게 전개하고 무상으로 보면 능히 저렇게 전개하되, 이러한 무량세계는 일원(一圓)으로 둘이 아닌 한 자리라는 것이다.
‘유상으로 보면’은 일원상 자리를 유상의 차원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유상의 상(常)은 ‘항상’ 상으로, 유상의 관점으로 보면 항상 그렇게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하여 청정부동(淸淨不動)한 자리이다. 또한 ‘무상으로 보면’은 일원상 자리를 무상의 차원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무상의 관점으로 보면 항상(常)함이 없는 것으로 시공간의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다. 이는 덧없다는 것이 아니라 생생약동하게 변화하는 작용을 뜻한다. 즉 무상으로 보면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만물은 생·로·병·사로, 사생은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유상과 무상에 위상차를 두는 것이다. 유상은 영원불멸한 본질이라면 무상은 덧없이 변하는 현상이다 라고 해 유상을 무상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시각이다. 불변의 유상을 변화의 무상보다 가치우위에 두어 유상은 무상을 초월하여 지배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유상과 무상은 다 일원으로 한 자리이다. 일원상 한 자리를 유상으로 보고 무상으로 보는 것이다. 유상은 불변하는 자리라면 무상은 변하는 자리이기에, 유상으로 보면 상주불멸하다는 뜻을 변하는 생멸 너머에 영원한 불변의 본질이 따로 있다고 여겨선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상은 생멸변화에 있어 생(生)에도 멸(滅)에도 분별하지 아니하여 생멸을 역력하게 드러내는 착(着)없는 청정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정한 이 자리가 실체로 존재(實有)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청정한 자리가 순간순간 여여자연(如如自然)한 것이다. 

결국 만물이 생멸거래로 변화해도 생멸이 드러나는 당처는 생해도 그 자리는 여여하고 멸해도 그 자리는 여여하여 스스로 그러한 세계이다. 이렇게 생멸변화에 착할 것이 없는 청정한 자리를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한 유상이라 하며, 유상한 그것도 또한 유상하다 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유상에서 변화의 무상이 드러나고, 순간순간 변하는 무상에서 또한 불변의 유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일원상 자리는 유상으로 보든 무상으로 보든 헤아릴 수 없는 무량세계의 전개로, 불변의 유상과 변화의 무상이 즉화(卽化) 된 둘이 아닌 자리이다.

/나주교당

[2020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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