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욱 원불교인권위원회 교무

원불교와 가톨릭, 개신교, 불교 및 시민사회단체가 서울시청광장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차별 선동에 반대하는 평화의 인간띠잇기를 함께 했다.

[원불교신문=강현욱 교무] 지난 1월 어린 시절부터 이 나라와 국민을 수호하는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어느 군인이 하사로 복무 도중 강제 전역 됐다. 같은 달, 인권변호사로 활동 중인 박한희 변호사가 롤 모델이라는 A씨는 숙명여대 법학과에 합격을 했지만 일부 학생들의 완강한 거부로 입학을 포기 했다. 강제 전역을 당한 하사의 군복무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A씨 또한 진학에 부정행위 등 법적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공동체에서 거부당했던 이유는 ‘트렌스젠더’라는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법적 성별정정을 마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과 대학에서 거부당한 이번 사례는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한 수용도가 얼마나 낮은지 잘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트렌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통계를 실시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의 통계를 통해 추정은 해볼 수 있다. 2019년 OECD 14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는 성인인구의 2.7%로 파악됐다. 이를 우리나라 인구 5100만 명에 적용해 보면 무려 137만여 명이나 된다. 2000년도 유엔에서는 외부성기와 염색체가 일치 하지 않는 간성(인터섹스)인구는 전 세계인구 중 1.7%로 추정된다고 밝혔는데 이를 적용해도 생물학적으로 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구조에 들어가지 않는 성소수자가 86만 여명이나 됨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성소수자 증가율은 시대에 따라 성정체성이 변화했다기 보다 차이와 차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성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열린 시대’로 가고 있다고 해석함이 옳다. 우리나라는 앞선 두 사례를 시작으로 사회곳곳에서 더욱 많이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의 문제에 답을 요구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부처로 모시고 불공 하는 원불교에도 답을 요구할 것이다.


성소수자는 교무가 될 수 없는가
2012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예비교무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책임자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예비교무는 수학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교포이기도 했던 예비교무의 사정을 알게 된 미주선학대학교에서 미국의 교육법상 남녀, 흑백, 성정체성 등으로 차별받을 수 없다며 교육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예비교무가 미주선학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논의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예비교무는 전무출신을 포기했다. 원불교 헌규 내 전무출신에 대한 심사규칙 19조 중 어디에도 성소수자는 교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령은 없었다. 수양·연구·취사 과목 모두에서 모범적이었고, 문화, 예술면에서도 뛰어나며 다재다능한 예비교무였다. 그러나 단 하나, 성정체성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 예비교무는 믿음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세계를 꿈꾸는 원불교 공동체라면 성정체성이라는 차이보다는 교법에 대한 신심과 그 법을 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봐주리라는 믿음.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 믿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인연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성을 발현하며 나를 살려주는 존재, 그들이 바로 내 옆의 부처님이다. 당신은 ‘차별주의자인가?’ 또는 ‘차별을 하고 있는 가?’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차별해야지’하는 의지를 가지고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 속에 용인된다고 생각하는 ‘당연한 것’들을 행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차이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또한 ‘아무리 모두가 부처다’라고 외쳐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차별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법정신 되살려야 
소태산 대종사가 과거시대를 도가나 정부나 민간에서나 차별 세우는 법을 주로 해 사람을 다스려왔다라고 평가했듯이, 차별이 사회를 안정적이고 효과적 유지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던 시대도 있었다.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1916년에도 수많은 차별제도들이 존재 했고, 이 불합리한 차별제도는 서로를 평등한 부처로 볼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소태산은 지자본위에서 반상(班常), 적서(嫡庶), 노소(老小), 남녀(男女), 종족(種族) 다섯 가지 차별제도를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해결과제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진급하기 위해 한 가지 차별을 인정했으니 그것이 지우차별이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나보다 더 나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공동체의 진급을 위해 그 지혜를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분야별 지혜의 있고 없음에 따라 장을 열어 줄 뿐, 어떤 조건으로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바로 수많은 얼굴을 가진 부처님에 대한 불공의 기초이다. 

계급으로 이루어진 전근대의 시대가 끝나고 힘이 곧 질서였던 제국주의의 시대도 종식됐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아직 과거 시대 차별의 습관들이 남아있다. 더욱 큰 문제는 차별의 대상이 비정규직노동자,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는 점이다. ‘평등한 관계’에서는 단순한 ‘차이’이지만 ‘권력 관계’에서 ‘차이’는 쉽게 ‘차별’로 이어 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는 ‘우리는 평등해’라고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상존하는 차별로 인한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차별금지법’과 같은 제재수단도 필요한 것이다. 특히 여성,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이 ‘혐오’가 되어 사회 문제로 떠오른 때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시급하지만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 개신교교단의 적극적인 반대로 인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2007년 입법예고 한 이래로 13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차별금지법이 통과됐다고 해서 우리사회에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단 내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
소태산 대종사가 남녀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녀권리동일이라는 교리까지 제정했지만 100년이 지나서야 원불교의 대표적인 남녀차별제도였던 여성교역자의 정녀지원서 의무제출 문제가 해결됐듯, 공동체의 약속과 목표가 기존의 사회문화를 변화시켜 현재의 문화로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공동체의 약속과 선언은 그 사회가 선언 이전으로 퇴보하지 않게 하는 기점을 만들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996년 정녀지원서가 법제화된 이후 매년 법 개정의 목소리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남녀차별을 없애고자했던 대종사의 정신이 교리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차별금지법’ 제정이 정체된 이때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원불교에서 ‘교단 내 차별금지법’을 제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점을 제시하면 어떨까 한다. 

우리는 일반인들의 입교에 있어 차별의 사례 없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예비교무의 서원을 좌절시킨 사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전무출신 지원 자격에 있어 차별금지 내용을 적시할 것을 우선 제안하고 싶다. 현재 지원 자격에 있어서 성별, 성정체성, 장애, 병력, 외모, 출신국가, 출신민족, 피부색, 언어 등으로 인해 전무출신 지원의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내역을 적시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차이에 대한 차별로 인해 부당하게 전무출신 지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선언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존재를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성소수자 부처님을 우리공동체안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을 ‘내 생활’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활’로 확장하고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2020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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