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이정택 원로교무, 고락에 대한 법문 2

고락에 대한 법문, 영원한 낙원생활 하자는 원불교 인생관
오면 맞이하고, 가면 전송하며, 대하면 화합하자
계문, 개인의 참다운 자유, 사회 행복평화의 근본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석가모니 부처는 세상을 고(苦)라 하고 대종사는 은혜라 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자연적 고통인 생로병사와 자신의 심신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사고(四苦)와 이와 함께 다른 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더해 팔고(八苦)로 밝혀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말씀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는 고, 미워하는 이와 만나야 하는 고, 구하여도 구해지지 않는 고, 육신을 갖고 있는 고를 들어 모두가 고라는 말씀을 하며 낙을 얻는 법문을 설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법문이 그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대종사도 현실에 살아가는 중생들이 물욕에 집착돼 있는 세계를 ‘파란고해’라는 표현으로 불타와 같은 입장으로 봤지만, 인생의 현실상을 고와 낙이 상반한다고 관찰했다. 정당한 낙속에서 영원한 낙 생활을 이루기 위해 ‘고락에 대한 법문’을 설해 고락의 원인을 깨치고 초월해 삼대력을 얻어 선업을 지으며, 고락을 자유하자는 것이다. 영원한 낙원생활을 하자는 원불교의 인생관이 담겨있는 법문이다. 석가모니 부처와 대종사의 공통점은 고락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역경에 처해도 선업으로 분발하면 복락을 받게 돼 고에서 낙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며, 순경에서 자만하고 나태하면 죄고의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팔고 법문을 보면 구하여도 못 구하는 고와 좋아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싫은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법문이 있다.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인연을 떠나야 하는 것이며, 물질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소유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한 때도 살아가기가 어려운데 어찌 세간을 떠나 생활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설명했듯, 중생세계에 있는 온갖 고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사고팔고(四苦八苦)의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불리의 관계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심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상시 생활표준으로 ‘오면 맞이하고, 가면 전송하며, 대하면 화합하자’라는 표준을 갖고 있다. 살면서 복과 혜, 인연은 뗄 수 없는 존재인데,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니요, 가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는 법은 없다. 복이나 인연 등 나에게 올 때는 손님맞이하듯 반갑게 맞이하고, 떠나게 될 때는 잘 배웅하면 또 언젠가 다시 반갑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때마다 잘 화합해 살아가다 보면 복도 쌓이게 되고, 지혜도 쌓이게 되며, 상생의 선연을 맺게 되는 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락과 천상락, 극락은 무엇이며, 천상락을 수용하면 인간 세상에 번뇌에서 해탈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가
극락이란 지극히 안락해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많이 알고 있다. 대종사는 정전 염불법을 통해 ‘우리는 바로 자심미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에 돌아가기를 목적하나니’라고 밝혔다. 또한 대종경 성리품 33장에서는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를 극락이라 했으며, 정산종사는 ‘우리의 정신이 온전하여 맑고 서늘하면 시방세계 어디서나 다 정토’라고 했으니, 극락세계가 이 세상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심미타를 발견하면 그 마음 안에 극락이 있다는 자성극락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인간락이란 현실의 삶에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세간락, 오욕락을 말하며 식·색·재물·명예·수면안일욕을 뜻한다. 천상락은 천상계의 사람들이나 신선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비유한 마음낙으로 수행인들이 생사고락에 해탈을 얻고, 윤회를 초월해 심신의 자유를 얻는 도를 뜻한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아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무상한 유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천상락을 구하기에 힘쓰자는 것이다. 천상락은 심신의 자유를 얻고 삼계의 대권을 잡아 만상의 유무와 육도의 윤회를 초월해, 어느 세계에 들어가 색신을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 조금도 물들지 아니해 길이 낙을 누린다고 했다.

그러나 천상락을 길게 받지 못하는 원인은 형상 있는 낙에 욕심이 발해 물질에 돌아감이다. 천상락 받을 일을 하지 않고 낙만 받을 욕심이 한 번 발해 문득 타락하면 순환하는 대자연의 수레바퀴에 끌려 심신의 자유를 잃게 된다. 정산종사는 무본편 45장에서 “무상 변천하는 세간락에 마음을 붙이어 마침내 복이 다하면 타락한다”라고 말씀하며 “일시적 향락과 영화에 집착하지 말고 불변 담박하고 영원한 도덕의 복락과 영화를 수용하라”라고 부촉했다. 


고가 변해서 낙이 되는 생활을 이끄는 공부가 계문이라 생각한다. 계문을 긍정적이며 재미를 붙여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계문은 공부의 요도인 삼학가운데 작업취사 과목에 해당되며, 인생의 요도인 사은 중 법률은에 보은하는 조목이다. 안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육근동작을 바르게 사용해 불의는 죽기로써 아니하는 실행력을 얻자는 것. 밖으로는 교단이나 사회의 질서에 순응해 법도에 맞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 악습을 고쳐 악도에 떨어짐을 방지하고 중생심을 제거해 본성을 이탈하지 않게 하는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하는 공부가 된다. 사회적으로는  불안의 근원을 불식하고 행복과 평화를 유지하는 근본이 되는 공부로 성불제중의 사다리, 제생의세의 첫걸음이 되는 초보적인 공부가 계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입멸 100일 전 “비구들아 내가 열반한 뒤 마땅히 계율을 존중하라. 이 계율을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 등불과 같고 빈곤한 이가 보배를 얻는 것 같고, 병든 환자가 좋은 의약을 만나 병이 낫는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라. 이 계율은 너희의 스승이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에 더 오래 산다 해도 이와 다를 바 없다”라고 했다.

대종사도 계문을 제정한 뜻은 인류생활을 행복을 파괴하고 사회의 평화를 침략하는 악독한 행동을 금지해 탈선되는 행동을 정당한 행동으로 인도하고 질서 없는 생활을 질서 있는 생활로 정리하려 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 성품에 과히 탈선되지 않는 청정 고결한 인간이 되며 평화롭게 만들자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본의를 깊이 각성해야 할 것이다.

등산을 하게 될 때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극복해야 가능하다. 계문을 생각하게 될 때 산의 정상을 가기위한 이정표로 생각한다면 계문을 준수하고 실천에 임하는 기쁨은 바로 정당한 고를 통해 영원한 낙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자기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부처가 되는 길임을 알고 끊임없이 신분의성으로써 이를 극복해 나간다는 서원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20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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