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산 송천은 원로교무

대종사의 외손자, 주산 종사의 아들로서 개척해온 교화의 길
제7·8대 원광대학교 총장 역임·6년 연속 우수대학선정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소태산 대종사의 큰딸 박길선 종사와 정산종사의 동생 주산 송도성 종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융산 송천은 원로교무(86·融山 宋天恩). 그는 원광대학교 제7·8대(1994년~2002년) 총장을 역임하며 원광대학교의 발전을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문학석사를 마치고 원광대학교 철학박사를 딴 그는 미국 예일대학, 컬럼비아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종교학회·불교학회 이사, 대한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종사와 함께 한 어린 시절
“대종사님이 외할아버지, 정산종사님이 큰아버지, 주산종사님이 아버지야. 중앙총부에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총부에서 보냈지.” 갓난아기 때부터 대종사를 뵌 영광을 가진 그에게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3살 정도였던 것 같아.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어머니가 빼앗아 갔는데, 그때 난 한번 울기 시작하면 도통 그치질 않았어. 대종사님이 아시고 종법실로 부르셨는데, 엉덩이를 찰싹 때리셔서 울음을 그친 기억이 있어.” 

좀 더 커서는 총부에서 함께 자라던 아이들과 쥐불놀이를 구경하느라 여기저기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대종사의 귀에 들어가 무섭게 매를 맞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구경만 했는데 다 소집을 해 놓고는 매가 부러지도록 때리셨어. 불이 날까 조심하라고 사랑의 매를 두들기신 것 같아. 인자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줄 때는 무섭게 혼을 내시기도 했지.”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는 섭섭하기보다는 대종사의 의중이 마음에 그려졌다. 

“5살 무렵부터 대종사님이 법문하실 때면 옆에 가서 듣곤 했지. 한창 목우십도송 법문을 할 때였어. 정산종사님이 법문을 읽으면 대종사께서 보설을 하셨지. 어린 나이에 무슨 뜻인지 잘 몰라서 중간에 나가니까, 대종사께서 법설 하시다 말고 저 녀석을 보라고 했어. 의미를 모르니까 가지 않으냐며 그것을 가지고 또 설법하셨지.” 대종사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천진한 아이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출가 서원
아버지였지만 공사에 바빴던 주산종사를 그는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했다. “주산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이 영산과 익산을 번갈아 가면서 주재하면서 일을 하셨었어. 주산종사님은 인기가 대단하셨어.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아버지에 대한 신망을 느낄 수 있었지. 가끔 집에 오실 때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하고 어른으로 모시곤 했어.” 

교단의 기대주였던 주산종사는 안타깝게도 광복을 맞아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 구호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하다 이재민의 전염병에 감염돼 1946년 40세의 일기로 열반하고 만다. 
시련은 계속됐다. 당시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목받던 송 원로교무의 형인 송전은에 관한 사연이다. “형님이 아주 천재였어. 어려서부터 영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능통했지.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만능이었어.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재미가 없다고 의대로 옮겼는데 수석을 했어. 2등이랑 20점 넘게 차이가 났다고 해.” 안타깝게도 집안의 기대주였던 그의 형은 젊은 나이로 급작스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산종사님이 건강이 안좋으셔서 남원에 요양하러 가셨을 때, 형님이 인사 갔다가 덥다고 목욕을 한다고 강에 들어가서 그만 감기에 걸렸어. 그때는 의사도 잘 없던 시절이라 열이 안 내리고 거기서 그대로 열반하게 돼서 난리가 났었어.” 

아버지인 대종사가 열반한 후 2년 뒤, 남편인 주산종사가 열반하고 촉망받던 큰 아들까지 떠나보내게 된 박길선 종사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주 고생이 많으셨어. 여자의 몸으로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셨어. 큰아들까지 잃고 나니까 어머니가 좀 고민이 되셨던 것 같아. 나를 전무출신 시키기보다 대학에 보내서 공부를 하게 하려했어. 그런데 정산종사님이 소식을 듣고 전무출신 안하고 다른 대학에 간다는 몇명을 불러서 설득을 하셨어. 그래서 다른 생각 안하고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지.” 어려서부터 이미 총부에서 생활했던 그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한 길이었다.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발전 이끌어
출가 후 1년 동안 중앙총부 교무부에서 주사로 근무한 후 퇴임 때까지 그는 원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종교와 원불교』, 『열린시대의 종교사상』 책 저술과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세상에 원불교를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제7·8대 원광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앞선 식견으로 학교 발전을 이끌어 6년 연속 국가에서 지정하는 우수대학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으며, 또 한번은 전국대학평가 1위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원광대 구성원들이 학교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는 학교의 위상제고를 위해 교육경쟁력, 연구경쟁력, 예체능 및 임상경쟁력, 경영경쟁력, 도덕경쟁력 강화를 위해 우수한 교수진 확보, 장학금 확대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고 성공적이었다. 한 해에 7명의 사법고시 합격생을 배출하기도 했으며, 의과계열 국시, 임용고시의 높은 합격률은 대학 입학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원광대학교 산본병원을 설립했으며, 이제는 어엿한 사이버대학교로 성장한 원광디지털대학교도 그가 총장으로 재임하던 2002년 개설한 사이버게임대학교가 그 시초이다. 그는 원광대학교 발전기금을 530억 이상 모으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상하좌우 많은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그리고 대학의 뒷세대를 위해 모아왔던 530억원의 적립금을 마련해 놓고 퇴임한 것은 나의 마지막 기쁨이 됐어.”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함께했던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교화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송 원로교무는 요즘도 교화 아이디어 개발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려면 하고 나면 기분이 좋고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해. 사람들을 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새로운 교화방법을 연구하고 있어. 종교에서 남을 지도할 때 그것을 통해서 어떤 방면으로든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해야 해. 건강술만 제대로 전해도 사람들을 상당히 모을 수가 있어.” 그는 긍정심리학 연구, 기공 등 건강 관련 연구, 예술 치료 등 공부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싱크리티즘(Syncretism)을 강조 했다. “요즘 시대는 융합이 중요해. 자기 것만 좋다고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야. 정산종사님이 삼동윤리를 말씀하셨는데, 동원도리라고 해서 다 똑같이만 하라는 것이 아니야.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융화해서 모든 면에서 다 좋게 할 수 있다면 그런 길을 찾아야 해.”

[2020년 3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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